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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승골성 : 고구려의 건국지로서 주몽이 최초로 도읍을 정한 산성(山城)

by jisik1spoon 2025. 11. 5.

흘승골성(紇升骨城)은 고구려의 건국자 주몽왕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곳으로, 한반도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역사 유적입니다. 이 글에서는 흘승골성의 역사적 배경, 지리적 특징, 건축 구조, 그리고 고구려 역사 발전에 미친 영향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흘승골성의 역사적 의의

흘승골성은 중국의 고대 역사서인 『위서(魏書)』의 고구려전에 고구려의 건국지로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왕은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하였고, 이 시기에 졸본천 유역에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서』의 기록에 의하면 주몽왕이 부여에서 남하하여 흘승골성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고 명시되어 있으며, 이것은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비류곡 홀본서성산(沸流谷 忽本西城山)'에 해당하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흘승골성은 고구려 최초의 도성(都城)이자 건국의 성지로서 한반도 고대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흘승골성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도 학자들의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흘(紇)'은 고대 한국어로 '슬' 또는 '수리'라는 뜻의 음차(音借) 표기이며, '골(骨)'은 '고을'이나 '성(城)'과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고대 한국어입니다. 따라서 흘승골성은 '수릿고을'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이는 졸본(卒本) 또는 홀본(忽本)과 같은 고구려 초기 도성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들과 동일한 장소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명칭의 다양성은 고대에 음차와 훈차가 병재되어 사용되었던 문자 표기 방식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흘승(紇升)'과 '홀본(忽本)'의 관계를 살펴보면, 고대 한국어의 음운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흘(紇)'은 발음상 '홀(忽)'과 통하며, '승(升)'은 글자 형태상 '본(本)'이 잘못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흘승골성은 사실상 홀본골성과 동일한 장소를 지칭하며, 이는 고구려 초기의 도성이 여러 명칭으로 불렸던 사례를 보여줍니다. 고대 한국어에서 '골'이라는 단어는 마을이나 촌락, 성읍을 의미하는 단어였으므로, 흘승골성의 명칭 자체가 고대 한국의 도시 체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흘승골성의 지리적 위치

현재 흘승골성은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요령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환인 시가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8.5킬로미터 떨어진 오녀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곳은 부이강(沸江)과 혼강(渾江)의 합류지점 근처에 위치합니다. 오녀산은 해발 820미터의 험준한 산으로, 산 정상부에 올라서면 환인분지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오며, 멀리 서쪽으로 환인 마안산성, 동쪽으로 집안의 패왕조산성까지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흘승골성은 수륙 교통의 요충지이자 난공불락의 천혜의 요새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흘승골성이 위치한 오녀산 지역은 고구려 초기의 경제 활동에도 매우 유리한 환경이었습니다. 혼강 유역은 풍부한 수산 자원과 수로 교통을 제공했으며, 주변 산림은 목재와 사냥감을 풍부하게 제공했습니다. 환인분지는 비옥한 토지로서 농업에 적합했으며, 이러한 조건들은 고구려의 초기 정착과 국가 형성에 필수적인 자원들을 제공했습니다. 또한 이 지역은 한(漢) 왕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고구려가 정치적 자주성을 유지하기에 적절한 위치였습니다.

흘승골성 주변 지형을 살펴보면, 고구려의 이원적 도성 체제(二元的 都城體制)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산 위의 산성인 흘승골성 외에도 인근에는 평지성인 하고성자성(河古城子城)과 나합성(蝲哈城)이 있었습니다. 이들 평지성에서는 일상적인 도읍 기능이 이루어졌고, 흘승골성은 유사시에 왕과 관료들이 피난할 수 있는 산성으로 기능했습니다. 이러한 도성 체제는 고구려가 처한 북방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어 전략이었습니다. 중국의 발굴 조사에서 하고성자성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오녀산성의 것과 비슷하다는 점은 두 성이 같은 시대에 함께 기능했음을 시사합니다.

흘승골성의 건축 구조와 특징

흘승골성은 험준한 자연지세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축조된 산성입니다. 성의 서쪽, 남쪽, 북쪽은 깎아지른 절벽을 천연장벽으로 활용하였으며, 인공 성벽은 지세가 상대적으로 완만한 동쪽과 동남쪽에만 축조하였습니다. 성 전체의 크기는 동서로 약 300미터, 남북으로 약 1킬로미터에 이르는 상당히 큰 규모입니다.

성벽의 총 길이는 약 4,754미터로, 이 중 천연성벽은 4,189미터, 인공성벽은 565미터입니다. 동벽은 정상부에서 약 200미터 아래의 동편 산허리에 남북의 방향으로 축조되었으며, 안쪽으로 휜 활 모양으로 약 1,000미터에 이릅니다. 이러한 곡선형의 성벽 구조는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력을 극대화하는 고대 군사 건축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남벽은 약 424미터의 길이로 정상 남단의 작은 장대(將臺) 아래에서 시작하여 동남쪽으로 가다가 동으로 꺾여 동벽과 만나는 굽은 자 모양(折尺形)입니다. 북벽은 전체 길이 약 475미터로 모두 천연성벽이며 안으로 휜 활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서벽은 정상부 북단에서 서남 모서리 구간까지로, 서문 부근의 인공성벽을 제외하면 모두 천연성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벽은 초기의 축조방식인 간타루법(干打壘法)으로 축조되었는데, 이는 목재 틀과 흙을 번갈아 다져 축조하는 선토(夯土) 방식입니다. 이 축조 방식은 돌을 깔아서 만드는 석축 방식과는 다르지만, 고대 동아시아 성벽 건축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기법입니다. 인공 성벽은 모두 석축(石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벽 윗부분의 바깥쪽에는 대부분 성가퀴(女墻)를 설치하였습니다. 성가퀴는 방어자들이 몸을 보호하면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낮은 벽 구조입니다. 성가퀴 기단을 따라서 안쪽에는 네모난 돌 구멍(石洞)을 쌓아 방어 기능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들은 흘승골성이 고도의 방어 기능을 갖춘 구조물임을 입증합니다.

성의 남쪽에는 유일한 성문이 있었습니다. 이는 흘승골성이 주로 방어와 피난을 목적으로 설계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성안은 넓고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중간에는 주요 식수원으로 사용된 샘이 있습니다. 샘 주위는 석판으로 네 벽을 쌓아 장방형의 연못을 형성했는데, 이는 '천지(天池)'라 불렸습니다. 이러한 수원 시설은 장기간의 포위 상황에서도 성을 방어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방위 시설이었습니다. 고대 성의 공략에서 물 부족은 가장 중대한 약점이었기 때문에, 이 천지의 존재는 흘승골성의 방어력을 현저히 높여주었습니다. 성안에는 주몽왕 때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궁전(宮殿)과 신묘(神廟)도 있었을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흘승골성의 초기 운영과 건국 설화

흘승골성을 둘러싼 건국 설화는 고구려 고대사의 중요한 자료입니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주몽왕 4년(기원전 34년)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이 7일 동안이나 빛을 분별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을 7월에는 성곽과 궁실을 지었는데, 이때 하늘이 검은 구름 속에서 7일 만에 궁궐과 성곽을 축조했다는 신비스러운 전승이 전해집니다. 이러한 신화적 표현은 흘승골성이 고구려인들에게 얼마나 신성한 장소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성곽이 위치한 높고 깎아지른 절벽이 운무 속에 싸여 있는 모습은 고대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이러한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낳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에서 주몽은 하늘의 아들이자 물의 신의 후손으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신화적 표현은 고구려의 정치적 정당성을 신성성으로 뒷받침하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흘승골성은 이러한 신성성의 구체적인 장소 역할을 했습니다. 주몽이 이곳에 도성을 정한 것은 단순한 지리적 선택이 아니라 신성한 장소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주몽왕과 소서노는 이 곳에서 약 6칸 정도 규모의 건물을 지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 흘승골성 내에서는 고구려 건국 초기에 필요한 제정(祭政)을 아우르는 중요한 역할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고고학 발굴 결과에 따르면, 오녀산성 정상부의 제3기 문화층이 고구려 건국 초기에 해당하며, 이 시기에 1호 대형건물지가 발견되어 초기 궁전 유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발굴 유물들은 흘승골성이 고구려 건국 초기의 정치, 종교, 경제의 중심지였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흘승골성에서 국내성으로의 천도

흘승골성이 고구려의 초대 도성으로 기능한 것은 약 40년 정도 지속되었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유리왕은 흘승골성이 험준한 산 위에 있어 일상적인 도시 운영과 백성의 생활에 불편함이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기원전 19년(유리왕 22년) 유리왕은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새로 축조하였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건국 초기의 방어 위주 체제에서 벗어나 더 안정적이고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새로운 도시 구조를 추구했음을 의미합니다.

천도의 구체적인 계기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유리왕 21년에 제사에 희생물로 쓸 돼지가 도망치자, 담당 관리인 설지(薛支)가 이를 뒤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고, 돌아와 유리왕에게 "국내 위나암은 산이 험하고 물이 깊으며, 땅이 오곡을 기르기에 알맞고, 사슴과 물고기가 많습니다.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면 백성에게 크게 이롭고 병란도 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보고합니다. 이 이야기는 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구성된 신화적 설화로 보이지만, 고구려가 흘승골성의 지형적 제약을 극복하고 더 발전된 도성으로의 이동을 추구했음을 시사합니다. 유리왕이 직접 국내 지역을 시찰한 후 천도를 결정했다는 점은 이 결정이 신중하고 계획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천도의 배경에는 고구려 내부의 정치적 변화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몽과 소서노 세력, 그리고 북방에서 남하한 주몽의 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이 존재했으며, 유리왕이 국내성으로의 천도를 통해 자신의 정치 기반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국내성으로의 천도는 고구려의 영토 확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고구려는 한반도 만주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고고학 발굴과 흘승골성의 역사적 재평가

20세기 후반부터 중국 측에 의해 진행된 오녀산성의 발굴 조사는 흘승골성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96년 이후 진행된 발굴에서 출토 유물로는 기원 전후까지 소급할 수 있는 철제품을 비롯하여 고구려 전기의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물들은 흘승골성이 실제로 고구려 초기의 중요한 도시였음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중국 측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제3기 문화층은 고구려 건국 초기에 해당하며, 제4기 문화층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제4기 문화층에도 5~6세기에 해당하는 토기들이 있음이 확인되어, 오녀산성이 고구려 초기부터 후기까지 계속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다만 주목할 점은 오녀산성에서 아직까지 기와 건물지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흘승골성 안에 건국지라는 의미에서 특별한 의례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천지(天池)의 구조는 고구려의 수공학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자연 샘을 개수하여 석판으로 네 벽을 쌓아 만든 이 저수지는 고도의 계획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벽에서 발견되는 보수 흔적들은 흘승골성이 장기간 사용되면서 계속 유지보수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흘승골성의 도성 체제와 정치적 의미

고구려의 도성 제도는 흘승골성의 사례를 통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이원적 도성체제를 운영했는데, 이는 평지의 도성과 산 위의 산성을 함께 배치하는 방식입니다. 흘승골성은 산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동시에 건국지로서의 정치적 상징성을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체제는 중국의 여러 북방 유목 정권과 한(漢) 왕조의 위협으로부터 왕실을 보호하려는 실질적인 방어 전략이면서 동시에 고구려의 건국 정통성을 표현하는 정치적 장치였습니다.

주몽왕이 건국한 이후 유리왕 대까지 흘승골성이 40년간 고구려 최초의 도성으로 기능했다는 점은 고구려 건국의 신성성과 지속성을 상징합니다. 비록 국내성으로의 천도로 행정 중심지가 이동했지만, 흘승골성은 고구려 왕실이 건국의 성지로서 계속 중요시하는 장소로 남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고구려의 후대 왕들도 흘승골성을 건국 정통성의 상징으로 여겼으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이곳으로의 귀향을 고려하는 정도의 상징적 중요성을 부여했을 것입니다.

흘승골성의 이원적 도성 체제는 고구려 이후 여러 국가들에 의해 모방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삼국시대 이후의 산성 축조와 평지 도성의 배치 체계는 고구려의 흘승골성 모델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는 흘승골성이 단순한 역사 유적이 아니라 동아시아 고대 도시 계획의 중요한 선례를 제시했음을 의미합니다.

결론

흘승골성은 단순한 고대 유적을 넘어 한반도 고대사의 출발점이자 고구려 문명의 기초를 이루는 역사적 공간입니다. 주몽왕이 건국한 고구려는 700여 년의 긴 역사를 통해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발전했으며, 그 시작점이 바로 흘승골성이었습니다. 현재 오녀산성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요령성에 보존되어 있는 흘승골성은 고고학 조사를 통해 고구려 초기의 도시 구조, 건축 양식, 생활 문화 등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흘승골성의 역사적 가치는 건축 구조의 우수성이나 고대 방어 체계의 선진성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흘승골성이 상징하는 바는 북방 유목 세력과 한반도 토착 세력의 결합, 산성과 평지성이 함께 기능하는 이원적 도성체제, 그리고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이 어떻게 한 나라의 건국과 발전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역사의 흐름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고구려가 발전 과정에서 국내성, 환도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양성으로 천도했던 과정도 흘승골성이라는 출발점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흘승골성은 한반도 고대 국가의 형성과 발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역사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흘승골성에서 출토되는 유물들과 발굴 현황은 한반도의 고대 문명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주몽의 후손들이 계속 고구려를 발전시키면서 흘승골성은 비록 도성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정신적이고 정치적인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유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흘승골성은 고구려인들에게 자신들의 국가 정체성과 건국의 정통성을 상기시켜주는 거대한 상징물이었으며, 고구려 역사의 모든 시대에 걸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흘승골성은 단순한 역사 유적을 넘어 고대 동아시아 역사와 문명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통로이자 귀중한 자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