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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량과 :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로 선발한 조선시대 특별 과거

by jisik1spoon 2025. 10. 21.

현량과는 조선시대 중종 때 단 한 차례 시행된 특별한 관리 선발 제도입니다.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파의 건의로 실시된 이 제도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를 통해 선발하고 대책으로 시험하여 관직에 등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기존의 과거제도가 사장(詞章) 위주로 진정한 인재를 선발하기 어렵다는 비판에서 출발하여, 경학과 덕행을 중시하는 새로운 인재 등용 방식으로 제안되었습니다. 현량과라는 명칭은 중국 한나라 때 추천을 통한 인재 선발 방식인 현량방정과에서 유래한 것으로, 천거과 또는 기묘천과라고도 불렸습니다.

현량과의 역사적 배경과 제안 과정

중종은 중종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지만 반정공신들의 세력이 강하여 왕권이 약한 상황이었습니다. 연산군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유교적 정치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신진 사림파를 적극적으로 등용하였습니다. 중종은 사장을 중시하는 기존 제도를 개선하고 경학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자 하였으며, 성리학 서적들을 경연에서 강독하게 하고 주자학파의 저작들을 간행하고 배포하였으며 소학을 최초로 언해하는 등 경학 공부를 장려하였습니다.

 

1517년(중종 12년)부터 조광조를 비롯한 삼사의 관원들은 기존의 과거 제도가 사장 위주로 운영되어 경학과 덕행을 갖춘 인재를 선발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들은 종래의 과거제가 제도 자체의 본질적인 모순으로 유생들에게 사장의 학습만을 일삼게 하여 성리학의 학리 추구와 덕행 함양을 소홀히 하도록 만든다고 여겼습니다.

 

1518년(중종 13년) 3월 당시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조광조는 한나라의 현량과와 방정과의 뜻을 이어 천거와 시험을 접목해서, 덕행으로 천거받은 이들을 대책으로 시험하여 선발하는 방식을 제안했습니다. 영의정 정광필은 해당 제도가 전통적인 과거 제도를 해치고 후보자 추천에 불공정성이 발생할 소지가 있음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우찬성 안당과 대사헌 최숙생 등의 지지를 얻어 별시로 시행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습니다.

현량과의 선발 방식과 절차

현량과의 선발 절차는 매우 체계적이고 엄격하게 설계되었습니다. 서울에서는 사관(예문관,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이 유생과 현직 관리를 막론하고 후보자를 성균관에 천보하면, 성균관은 이를 예조에 전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중추부, 육조, 한성부,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도 예조에 후보자를 천거할 수 있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유향소에서 수령에게 천거하면 수령은 관찰사에게, 관찰사는 예조에 전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예조에서는 각처에서 올라온 선발 후보자의 성명, 출생 연도, 자와 천거 사항 등을 종합하여 의정부에 보고한 뒤, 그들을 전정에 모아 왕이 친림한 가운데 대책으로 시험하여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습니다.

 

현량과의 천거 명목에는 성품, 기국, 재능, 학식, 행실, 행적, 생활 태도, 현실대응 의식 등 일곱 가지 항목이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문장 능력이나 경서 암기 능력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의 전반적인 자질과 품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자 했음을 보여줍니다.

현량과의 실시와 합격자 선발

1518년 말까지 서울과 지방에서 천거한 120명의 명단이 마련되었습니다. 예조에서는 이 중 자질에 대한 심의를 통과한 추천자들을 선별하였고, 1519년(중종 14년) 4월 13일 근정전에서 120명을 대상으로 대책 시험을 실시하여 문과에서 장령 김식 등 28명을 선발하였습니다. 같은 날 모화관에서 무과도 시행하여 정린 등 46명을 선발하였습니다.

 

문과 급제자 28명의 급제 당시 신분을 보면 현직 관리 10명, 전직 관리 2명, 생원 5명, 진사 7명, 유학 4명이었습니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35세가 넘었으며, 이미 12명이 관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는 현량과가 사회 초년생이 아닌 이미 상당한 경험과 능력을 갖춘 인재들을 선발하고자 했음을 보여줍니다.

 

현량과의 장원급제자였던 김식은 천거 명목 일곱 가지 항목 모두에서 유일하게 만점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당시 사림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얻고 있었고, 조광조에 버금갈 만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김식은 현량과 급제 닷새 뒤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였고, 10일 후에는 홍문관 직제학에 올랐으며, 얼마 후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습니다.

현량과 합격자들의 등용과 역할

현량과 급제자들은 조광조와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 의식을 지닌 이들로, 급제 후 홍문관을 비롯한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성균관 등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하던 삼사와 주요 기관의 요직에 기용되어 조광조와 뜻을 같이하였습니다. 이들은 당시 과거제도를 통해 등용된 관리들과는 달리 상당한 지위에 등용될 만한 사람들을 뽑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사회 초년생임에도 불구하고 종6품, 종7품으로 등용되어 조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현직 관리가 아니었던 11명은 즉시 실직을 받았는데 품계는 정6품 4명, 정7품 1명, 정8품 1명, 정9품 5명이었습니다. 이는 기존의 과거제도와는 다른 파격적인 대우였으며, 이들이 빠르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현량과에 대한 논란과 비판

현량과는 그 급제자가 공개되자 공정하지 못하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급제자 명단에 천거제를 지지한 안당의 세 아들 안처근, 안처겸, 안처한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고, 또한 조광조와 절친했던 김식과 지평 박훈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당은 이조판서 시절 성균관 학생이던 조광조를 천거해 시험도 보지 않고 종6품에 올려준 전력이 있었으며, 이러한 배경 때문에 현량과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반대파들은 현량과 급제자들이 대부분 명문 귀족 출신의 자제들로 정부와 상당한 연줄이 있고 한양에 거주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이는 '숨어 있는 인재들을 널리 구한다'며 내세운 애초의 취지와는 달랐던 것입니다. 현량과는 덕행을 중시한 인재 선발 방식으로 제안된 것이지만 그 목적과 더불어 신진 사림의 세력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초 현량과의 실시는 신진 사림파와 대립하고 있던 훈구 세력에게는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들은 이 제도가 전통적인 과거 법규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사림파 세력 강화에 목적이 있다고 보았으며, 인재 천거에 공정을 기할 수 없다며 극력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기묘사화와 현량과의 폐지

1519년 10월 조광조를 비롯한 현량과 출신 관료들은 중종반정의 정국 공신들에 대한 위훈삭제 상소를 올렸고, 이것은 11~12월의 기묘사화로 이어졌습니다. 기묘사화는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 사류가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훈구 재상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으로, 중종의 신임을 얻고 있던 사림파가 위훈삭제를 주장하여 훈구 세력을 공격하자 이들이 계략을 꾸며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류를 제거한 것입니다.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이 축출당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주도하여 시행한 현량과 역시 폐지되었으며, 현량과의 문과 급제자는 그 자격을 박탈당하였습니다. 현량과는 신구 세력, 즉 공신 및 고위 관료와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의 대립을 격화시켜 위훈삭제 문제와 더불어 기묘사화를 유발시킨 원인이 되었습니다.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 사림파가 실각하자 현량과는 폐지되고 급제자의 자격마저 박탈되었습니다. 그 뒤 인종 말년에 급제자의 자격은 잠시 복구되었으나 명종이 즉위하자 다시 박탈되었고, 1568년(선조 1년) 10월에 이르러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현량과의 복권과 역사적 재평가

선조 시대 사림파가 정국을 장악하면서 현량과 급제자들에 대한 파방 조처가 철회되었습니다. 선조 시대에 조광조는 공식적으로 복권되어 최고 관직인 영의정과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으며 서원까지 건립되었습니다. 이어 광해군 시대에는 문묘에 배향되어 명실상부 조선 유림의 큰 뿌리로서 다시 기억되었습니다.

 

이후 추천을 통한 인재 선발의 필요성이 여러 차례 건의되었으나, 결국 현량과는 복설되지 못하고 중종 때 단 1회만 시행된 것으로 그치게 되었습니다. 다만 조선 후기에는 현량과와 산림 등용의 제도가 운영되기도 하였습니다.

현량과와 한나라 향거리선제의 비교

현량과는 중국 한나라 때의 현량방정과를 본떠 만든 것으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에 의해 대책만을 시험 보고 채용하는 제도였습니다. 한나라의 향거리선제는 지방관과 지방의 유력자가 관내의 우수한 인물을 추천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그 과목으로는 효렴, 현량, 방정, 직언, 문학, 계리, 수재 등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178년 한나라 문제는 현량방정하고 직언극간하는 선비를 천거하라는 칙령을 내렸고, 기원전 134년에는 동중서의 건의에 의해 무제가 군수들에게 매년 한 명의 유덕자를 추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향거리선제의 인물평가 과목으로는 효렴, 현량, 방정, 직언, 문학, 계리, 수재 등이 있었으며, 조선의 현량과는 이러한 중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조선의 상황에 맞게 변형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향거리선제가 지방의 인재를 찾기 위한 목적이었고 태수 등 지방 관리에게 천거할 권한이 있었던 것과 달리, 현량과는 실제로는 명문 귀족 출신의 자제들이 대부분이었고 한양에 거주하는 이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현량과가 제도 자체의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현량과와 과거제도의 차이점

현량과는 기존의 과거제도와 여러 측면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관리 임용 시험인 과거는 경서의 내용을 강론하는 강경과 글짓기인 제술 과목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만으로는 학문과 덕행을 두루 갖춘 인재를 뽑기 어렵다는 비판이 항상 제기되었습니다.

 

과거제도는 사장 중심으로 운영되어 유생들에게 성리학 본질에 대한 탐구보다는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과거제 시행 과정에서 다양한 폐단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현량과는 사장이 아닌 경학과 덕행을 기준으로 인재를 천거하여 관리로 선발하는 제도였습니다.

 

현량과는 과거제도와 달리 추천에 의한 관리 임용을 주장하였으며, 천거받은 이들을 대책만으로 시험하여 선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과거제도가 여러 단계의 시험을 거쳐야 했던 것과 달리, 현량과는 천거를 거쳐 단 한 번의 대책 시험만으로 선발되었습니다.

현량과의 정치적 의미와 영향

현량과는 연산군 대의 어지러운 정세와 조선 전기 과거제도가 가지는 전통적 인습의 한계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통치 질서를 수립하는 기초적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중종은 훈구파의 위세에 눌려 목소리를 내지 못하다가 반정 삼공신인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이 사망하자 새로운 인재인 사림파를 대거 등용했으며, 이는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림 세력들은 언론 기능을 담당하던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삼사에 포진해 훈구 세력을 압박했으며, 그 중심에 있던 조광조는 뜻을 함께하는 정치 세력을 키우기 위해 현량과를 실시했습니다. 현량과로 선발된 관리는 대부분 신진 사림 출신의 인재들로, 요직에 등용되어 성장했습니다.

 

현량과의 실시는 사림파와 대립하고 있던 철구파에게는 심각한 도전이었고, 후일 기묘사화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현량과는 당시 시대적 성격과 급제자의 신분을 관련시켜 볼 때, 지치 실현을 위한 사림파 세력 보강의 비상 대책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습니다.

현량과의 교육사적 의미

현량과의 실시는 성종 후반부터 대두하는 도학적 관심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종은 성리학을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고자 하였으며, 사장 중심에서 경학 중심으로의 전환을 시도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인재 선발 제도의 변화가 아니라 조선 사회가 지향하는 교육과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현량과는 개인의 덕행이나 학문적 능력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 재야현인의 등용을 중시하였습니다. 천거 대상자를 가리켜 '현량'이라 하였으며, 현의 뜻은 문무의 재능과 효제충신 등의 덕행을 가리켰습니다. 이는 조선 사회가 단순히 지식만이 아니라 덕행과 실천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했음을 보여줍니다.

현량과 제도의 한계와 문제점

현량과는 본래 과거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참다운 인재 선발을 위한 제도로 활용되었으나, 결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다지기 위한 포석에 불과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재를 천거하는 사람이 신진 사림 세력으로 조정을 장악하기 위한 시도를 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현량과라는 제도로 당시 사림과 훈구파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사화가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현량과는 처음부터 끼리끼리 해먹을 수 있다는 단점이 지적되었으며, 실제로 안당의 세 아들이 모두 합격하는 등 공정성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현량과 급제자들이 명문 귀족 출신의 자제들로 정부와 상당한 연줄이 있고 한양에 거주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은, 이 제도가 표방한 '숨어 있는 인재를 널리 구한다'는 취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현량과와 조선 후기 천거제

조선 후기에는 과거제 시행이 극히 문란해지자, 실학자들은 그 개혁 방안으로서 과거제를 폐지하고 천거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자는 천거제론이나, 천거제와 과거제의 혼합형을 제안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현량과가 비록 한 차례만 시행되었지만, 천거를 통한 인재 선발이라는 이념이 조선 시대 내내 지속적으로 논의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조선 후기에는 현량과와 산림 등용의 제도가 운영되기도 하였으며, 이는 현량과의 이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계승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만 현량과가 가졌던 구조적 문제점과 정치적 편향성에 대한 우려로 인해 현량과 자체가 다시 부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현량과는 조선 중종 때 단 한 차례 시행된 특별 과거 제도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를 통해 선발하고자 한 시도였습니다. 비록 공정성 문제와 정치적 편향성으로 인해 기묘사화를 유발하고 폐지되었지만, 과거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중요한 제도적 실험이었습니다. 현량과의 실시와 폐지는 조선 시대 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적 대립, 그리고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