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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 압구정 : 조선 최고 권력자가 한강변에 세운 정자로 현재 강남구 압구정동의 지명 유래가 된 역사적 장소

by jisik1spoon 2025. 10. 25.

조선 최고의 권력자, 한명회와 압구정

압구정은 조선 전기 최고의 권력자였던 한명회가 1476년(성종 7년) 한강변에 지은 정자로,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장소입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는 계유정난을 설계한 인물로, 세조부터 성종까지 3대에 걸쳐 조선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던 문신이자 정치가입니다.

한명회의 출생과 성장 배경

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본관이 청주이고,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압구(狎鷗)·사우당(四友堂)이며, 시호는 충성(忠成)입니다. 그는 1415년 10월 25일(음력)에 태어나 73세까지 장수하며 조선 전기 정치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한명회는 7개월 만에 태어난 칠삭둥이로, 태어났을 때 배 위에 별 모양의 점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처음에는 사람의 형체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나 점차 정상적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계유정난과 세조의 즉위

한명회의 본격적인 정치 활동은 1453년 계유정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수양대군(후일의 세조)과 함께 계유정난을 설계하고 실행하여, 당시 실권자였던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공로로 그는 좌익공신 1등에 책봉되었으며, 세조로부터 "나의 제갈량"이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세조 시대의 권세와 공훈

1454년에는 동부승지가 되었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승진했습니다. 이듬해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주살에 적극 가담하여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습니다. 1457년 이조판서가 되고 상당군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를 거쳐 1459년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체찰사를 역임했습니다.

북방 체찰사로서의 활약

한명회는 활쏘기와 병법에 뛰어났으며, 오지의 북방으로 파견을 나가 경계를 강화하고 야인들을 진압하는 등 군사적 공적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능력으로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영의정으로의 등극

1461년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고, 1462년 의정부우의정에 오른 뒤 1463년 좌의정, 1466년에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당시 그의 권세는 "천하가 한명회의 손 안에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왕실 인척으로서의 기반 강화

그는 셋째 딸과 넷째 딸을 각각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내 왕실의 외척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예종의 비 장순왕후와 성종의 비 공혜왕후가 자매가 되는 독특한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예종의 급사와 성종의 옹립

예종의 급서 후 한명회는 성종을 옹립하며 킹메이커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 번 드러냈습니다. 정희왕후의 결정에도 한명회의 정치적 영향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노년의 상징, 압구정의 건립

1476년(성종 7년) 한명회는 한강변에 압구정(狎鷗亭)을 지었습니다. ‘압구’는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으로, 명나라 사신 예겸이 지어 준 이름입니다. 권세의 정점에 있었던 한명회가 자연과 벗하고자 했던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압구정의 풍경과 문인들의 시선

압구정은 한강 남쪽 언덕에 자리하여 조망이 빼어났고, 겸재 정선의 작품에도 등장합니다. 이곳에서 왕과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열었으며,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습니다.

압구정 사건과 몰락의 시작

『해동잡록』에는 한명회가 중국 사신 접대 중 오만한 태도를 보여 성종의 노여움을 산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궁중의 차일을 빌리려다가 거절당하자 성종이 정자 철거를 명했고, 결국 대간의 탄핵으로 한명회는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권력의 쇠퇴와 말년

성종이 점차 친정을 시작하면서 한명회의 권력은 약화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압구정 사건으로 직첩이 박탈되었고, 1487년 73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한명회의 묘와 사우당의 의미

그의 묘는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에 있으며, ‘사우당(四友堂)’이란 호는 송죽매란 네 벗이 모이는 집이란 뜻으로, 그의 풍류와 인맥을 상징합니다.

압구정 지명의 유래와 변천

현재 압구정동은 한명회의 호인 압구정에서 유래된 지명입니다. 정자는 사라졌지만, 현대아파트 단지 사이에 압구정터 표지석이 남아 있습니다.

현대 압구정동의 발전

1970년대 한강 매립과 개발을 통해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고, 오늘날 압구정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부촌이자 패션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권력자 한명회의 역사적 평가

그는 조선 3대 왕조를 만든 킹메이커였으나, 권모술수로 평가받는 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압구정’이라는 이름은 6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결론: 압구정의 역사적 상징성

압구정은 단순한 별장이 아닌, 조선 전기 권력과 정치의 상징입니다. 권력의 정점과 몰락,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서울의 중심지가 된 현재까지, 압구정은 시대의 변화를 품은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