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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서 : 조선 후기 경종과 영조 시대의 영의정으로 소론의 영수이자 이인좌의 난을 고변한 정치가

by jisik1spoon 2025. 10. 19.

최규서(崔奎瑞, 1650-1735)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경종과 영조 시대에 영의정을 역임한 대표적인 소론 정치가입니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문숙(文叔), 호는 간재(艮齋), 소릉(少陵), 파릉(巴陵)이며, 광주 출신으로 삼당시인으로 유명한 최경창의 현손입니다. 그는 86세의 장수를 누리며 격동의 시대를 관통했고, 영조의 묘정에 배향된 조선시대 해주 최씨 가문 출신의 유일한 영의정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큰 인물입니다.

가문 배경과 초기 생애

최규서는 1650년(효종 1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학문적 전통이 깊은 명문가였으며, 현조부는 시인으로 유명한 최경창, 증조부는 최집, 할아버지는 최진해였고 생부는 현감을 지낸 최석영이었습니다. 양부는 최석유로서, 최규서는 양자로 입양되어 자랐습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최규서는 1669년(현종 10년) 20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았습니다. 이후 1680년(숙종 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소론의 소장파로서의 활약

최규서가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했을 때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초기부터 소론에 가담하였으며, 특히 나양좌를 옹호하는 등 소론의 소장파로서 활약하였습니다. 출사 초기 서인의 나문에서 뛰어난 재주로 시명을 얻어 언관이 되었는데, 정언으로 있을 때는 왕의 하교에 맞서 소신있는 논지로 소를 올려 논객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1685년 지평에 올랐고, 이어 이조좌랑과 수찬 등을 역임하면서 소론의 중심 인물로 자리잡았습니다.

 

최규서는 정치적으로도 명확한 소신을 보였는데, 최석정의 파직을 변호하는 등 소론의 소장으로서 적극적으로 활약하였습니다. 1689년 대사간에 올랐을 때는 남인에 맞서 희빈 장씨의 책봉을 반대하는 데에 앞장 섰는데, 이는 그가 당파적 입장을 넘어서 국가의 명분과 원칙을 중시했음을 보여줍니다.

지방관으로서의 선정

1694년 최규서는 외직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습니다. 이 시기 그는 지방 관리로서 탁월한 행정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당시 명곡 최석정이 전라도 지역 사람에게 최규서의 정사에 대해 물었을 때, 그 사람은 "특별히 다른 일은 없고 오직 세 가지 한가로운, 즉 삼한으로 일컬을 뿐이니 주부들의 부서가 한가롭고, 공방이 한가롭고, 기방과 풍악이 한가로운 것을 말합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는 최규서가 조용한 가운데 선정을 펼쳐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사회가 안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후 강화유수를 역임하였고, 주청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면서 부제학, 형조판서, 예조판서, 대제학 등 현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예조판서로 있을 때인 1698년(숙종 24년)에는 단종과 중종비 신씨의 복위를 의논하는 등 역사적 복권 사업에도 참여하였습니다.

병신처분과 낙향

1711년 소론의 최석정 등이 삭탈관작되고, 1716년 병신처분으로 소론이 실세를 거듭하자 최규서는 지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광주로 내려가 여생을 마치려 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많은 사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노론이 득세하고 소론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자, 최규서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은거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경종 시대의 소론 영수

1720년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자 상황이 급변하였습니다. 경종은 소론을 중용하였고, 최규서는 다시 중앙 정계로 복귀하게 됩니다. 1721년(경종 1년) 최규서는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이어 좌의정을 거쳐 1723년(경종 3년) 영의정에 올라 소론 정권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소론 정권은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 등을 임명하며 기반을 굳혔습니다.

 

최규서는 경종 시대 소론의 영수로서 연잉군(훗날의 영조)의 청정을 막는 등 소론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임사화의 주역 김일경과 달리 완론의 입장을 펼쳤으며, 고령인 데다가 경종 말년에는 낙향하여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러한 온건한 태도 덕분에 최석항, 유봉휘 등 다른 소론 인물들과 달리 영조 즉위 후 노론의 탄압에도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인좌의 난과 고변

1728년(영조 4년) 3월 14일, 최규서는 역사의 결정적 순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봉조하의 명예직을 지니고 있던 최규서는 안성에서 이인좌 등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급히 상경하여 조정에 고변하였습니다. 최규서의 급보에 따르면 안성의 장흠이라는 자가 안박과 반역을 공모하여 15일에 거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최규서의 고변으로 조정은 반란에 대비할 수 있었고, 영조는 도성문을 폐쇄하고 관군을 동원하여 서울의 방비에 만전을 기하였습니다. 이인좌의 난은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하여 일으킨 반란으로,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과 영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일어났습니다. 반란은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하면서 시작되었지만, 결국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인좌의 난을 고변한 사람이 소론의 원로대신인 최규서였고, 진압군의 면면도 오명항, 박문수, 조현명 등 소론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영조는 "소론의 난은 소론이 진압했다"고 선포하며 소론 전체를 역적으로 몰지 않았습니다. 최규서는 같은 소론이었음에도 국가의 안위를 위해 반란을 고변하였고, 이를 통해 완론 소론을 보호하며 역신 이인좌와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천명하였습니다.

일사부정의 어필과 영조의 신임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최규서에게 영조는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어필을 하사하였습니다. 이는 "한 올의 실로 나라를 부호하였다"는 의미로, 최규서의 고변이 위태로운 국가를 구했다는 최고의 찬사였습니다. 이 어필은 최규서의 집터 안에 있던 어서각에 봉안되었으며, 현재도 안성에 최규서 어서각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영조는 최규서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그가 81세로 사망한 후 시호를 충정(忠貞)으로 내렸고, 영조의 묘정에 배향하는 영예를 안겼습니다. 이는 조선시대 신하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으며, 최규서가 당파를 초월하여 국가에 공헌한 인물로 평가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청렴결백한 인품과 극기 정신

최규서는 정치가로서의 업적뿐만 아니라 개인적 인품으로도 존경받았습니다. 그는 일찍이 "소시에 길에서 여인을 만나 한번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면 눈을 감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마음이 장차 나를 죽이게 되는구나'하고 두 번 세 번 생각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최규서가 사리사욕을 이겨내는 극기공부를 젊었을 때부터 철저히 실천했음을 보여줍니다.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조용한 가운데 선정을 펼쳤던 일화나, 기로소에 들어간 후에도 명예직인 봉조하로서 국가의 위기를 막아낸 일 등은 그의 청렴결백한 인품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잘 보여줍니다.

학문적 업적과 저술

최규서는 정치가이자 학자로서도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실증적 사료 비판을 중시하는 역사관을 지녔으며, 민족의 뿌리와 도덕적 가치를 되새기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저서로는 『간재집(艮齋集)』이 있으며, 이 문집에는 단종과 신씨비의 복위를 의논한 「단묘기신비추복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명리설(名利說), 관심설(觀心說) 등 성리학적 사유를 담은 설(說) 형식의 글들도 남겼습니다.

 

최규서는 지방의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서원을 설립하고 인재양성에 힘쓴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는 후대에 많은 성리학자들이 배출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대사성, 대제학 등 학문을 관장하는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조선의 학문 발전에도 기여하였습니다.

역사적 평가와 의의

최규서는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소론의 영수로서 당파 정치의 중심에 있었지만, 동시에 완론의 입장을 견지하며 극단적 대립을 피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경종 시대에는 소론의 핵심으로 활약했지만, 영조 시대에는 당파를 초월하여 국가의 안위를 위해 이인좌의 난을 고변함으로써 역사적 대의를 실천하였습니다.

 

특히 같은 소론이었던 이인좌 등의 반란을 고변한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어려운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규서는 당파적 이익보다 국가의 안정과 백성의 안위를 우선시하였고, 이를 통해 완론 소론을 보호하면서도 역적과는 선을 긋는 정치적 지혜를 발휘하였습니다.

 

최규서는 1735년(영조 11년) 8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는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에 이르는 다섯 왕조를 거치며 격동의 시대를 관통한 인물로, 해주 최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자 영조의 묘정에 배향된 유일한 인물로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정치적 신념과 국가에 대한 충성, 그리고 개인의 도덕적 수양을 조화롭게 실천한 조선시대 선비의 모범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