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십자(靑十字)는 단순히 파란색 십자가 표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의료보험제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정표가 된 혁신적인 협동조합 운동이다. 1968년 부산에서 시작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한국 최초의 성공적인 민간 의료보험으로서, 오늘날 전 국민이 혜택을 받는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원형이 되었다. 이는 단순한 의료보험을 넘어서 "건강할 때 이웃을 돕고 병들었을 때 도움을 받는다"는 상부상조 정신을 구현한 사회운동이었다.
청십자의 어원과 상징적 의미
청십자 운동의 국제적 배경
청십자 운동은 1929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킴볼(J.F.Kimboll)에 의해 처음 주창된 의료보험제도다. 기독교 정신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처음에는 '바일로플랜(Baylor Plan)'이라고 불렸다. 1933년 미국병원협회의 지지를 받아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그해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서 비로소 '청십자운동'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청십자 운동의 기본 정책은 국민의 복지, 의료혜택, 병원과 의사를 선택할 자유, 비영리적 성격, 협동조합제 등이었다. 이는 영리를 추구하는 일반적인 보험회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십자가 상징의 의미
청십자의 '십자' 표시는 적십자(Red Cross)와 마찬가지로 구호와 치료를 상징한다. 적십자가 전시 상병자 구호를 목적으로 하는 반면, 청십자는 평시 의료보험을 통한 상호부조를 의미한다. 파란색(靑)은 평화와 안정, 신뢰를 상징하는 색으로, 의료보험제도가 추구하는 사회적 안정망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탄생
장기려와 채규철의 만남
한국의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1968년 5월 부산에서 시작되었다. 이 조합의 탄생에는 두 명의 핵심 인물이 있었다. 바로 장기려 박사와 채규철이었다.
장기려는 이미 1951년부터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운영하며 가난한 피난민과 행려병자들을 무료로 치료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 치료비를 마련하지 못해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치료를 받더라도 치료비를 지급하지 못해 곤란에 처한 이들을 안타까워하며 의료보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채규철은 덴마크 유학 중 의료보험제도의 혜택을 직접 받아 무료 치료를 받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장기려가 주도하던 성경연구모임인 '부산 모임'에서 의료보험조합 설립을 제안했다. 이것이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설립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조합의 창립과 초기 운영
1968년 장기려는 채규철, 김서민, 조광제 등과 함께 조합 설립을 위한 구체적 작업에 착수하여 723명의 조합원을 모아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발족시켰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진실·사랑·협동"이라는 3대 정신을 근간으로 내세웠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첫 가입자가 기독교 사상가이자 민주화 운동가인 함석헌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단순한 의료보험이 아니라 사회개혁 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운영 원리
저렴한 보험료와 평등한 혜택
조합원들은 소정의 가입비와 매달 월 보험료 60원이라는 저렴한 비용만 지불하면 되었다. 당시 자장면 한 그릇이 50원 정도였음을 감안할 때 상당히 저렴한 수준의 보험료였다. 이는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인두제를 택한 결과였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임의의료보험조합으로서 본인부담율이 초기에는 20%였으나 이후 30%로 상승했으며, 다시 20%로 재조정되었다. 외래진료는 처음에는 무료로 시작하였으나 1974-77년에는 정액제로 전환되었고, 1978년부터는 40% 정율제로 바뀌었다.
기독교적 이웃사랑 정신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다른 의료보험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기독교적 이웃사랑 정신이었다. 부산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처음 시작되었고, 부산 지역 교회들의 참여로 기틀을 갖추었다.
창립부터 해체까지 대표이사를 역임했던 장기려 박사는 이웃사랑을 "협동정신"으로 이해했고,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조합을 운영하고자 했다. 이들의 의식에는 기독교 신앙으로써의 이웃사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청십자 운동의 전국적 확산
언론 보도와 사회적 관심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성공은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를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1963년 의료보험법이 제정되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던 상황에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성공은 의료보험제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실증적 사례가 되었다.
당시 보건사회부 지방의정과와 사회보장심의위원회는 다양한 후보사업장과 접촉하여 의료보험조합 설립을 위한 설득에 나섰지만, 인식부족, 보험료에 대한 부담감, 임의가입 등 제도적 장치 미흡으로 각 사업장에서 수용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성공은 더욱 주목을 받았다.
청십자 운동의 전국 확산
1972년 광주를 비롯하여 전국에 청십자 운동이 확산되었다. 부산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성공에 고무되어 서울에 청십자한국의료협동조합이 설립되었고, 이후 전국 각지에서 유사한 조합들이 만들어졌다.
1972년 현재 부산 13,000여 명, 서울 1,500여 명의 조합원을 확보했다. 하지만 서울은 의료보험조합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 성공하기 힘들었고, 일부는 시도에 그치거나 해산되었으며, 몇몇만 남아 전국민의료보험이 실시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성과와 의의
재정적 안정성과 성공 요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초기 수년 동안은 보험재정 악화로 곤경을 겪기도 하였으나 1975년 이후 정착단계에 들어섰다. 1988년 해산될 때까지 비교적 건실한 재정상태를 유지했다는 점이 다른 의료보험조합과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이러한 재정 안정성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첫째,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한 강한 공동체 의식이 있었다. 둘째, 장기려 박사의 개인적 신뢰와 헌신이 조합원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셋째, 덴마크 협동조합 경험을 가진 채규철의 전문적 운영 노하우가 있었다.
1974년 말 조합 규모
1974년 말 시점에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총 4,648세대 19,730명의 회원을 확보하며 크게 성장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였으며, 민간 의료보험으로서는 전례 없는 성공이었다.
청십자의원과 청십자병원의 설립
직영 의료기관의 필요성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단순히 보험료를 징수하고 의료비를 지급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직영 의료기관을 설립하여 더욱 체계적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했다. 1975년 8월 4일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직영 병원으로 청십자의원이 출발했다.
1976년 12월에는 한국청십자복지회 소속으로 변경되었고, 1986년 청십자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는 청십자 운동이 단순한 보험조합을 넘어서 종합적인 의료복지 시스템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무료진료와 사회복지 활동
청십자병원은 1976년 부산 동구 수정동에 설립되어 무료진료에 나섰다. 장기려는 복음병원에서 은퇴한 후에도 청십자의원에서 진료하는 등 여러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했다. 이는 청십자 운동이 영리 추구가 아닌 사회봉사를 목적으로 했음을 보여준다.
정부 정책에 미친 영향
1977년 의무의료보험 도입에 미친 영향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성공은 1977년 정부의 의무의료보험 도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축적한 다양한 통계, 수치, 체계, 경험을 전국민의료보험 시행을 준비하는 데 활용했다.
특히 의료수가를 관행수가의 55%로 결정한 것은 관행 수가에 비해 저수가로 운영하던 사설 보험조합, 특히 청십자보험조합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는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한국 의료보험제도의 실질적 기초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의료보험 공백기의 역할
1977년 의무의료보험조합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공백기를 메우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의의는 매우 크다. 의료보험연합회는 1997년 발간한 "의료보험의 발자취"에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1968년 이후 시작된 임의가입의료보험조합 중에서 유일하게 성공했던 사례로 격찬했다.
청십자 운동의 사회적 의의
사회복지운동으로서의 성격
청십자 운동은 사회복지운동의 개념에 충실했다. 조합 구성원들이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아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영리 추구보다는 상호부조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단순한 의료보험을 넘어서 사회연대와 공동체 정신을 실현하는 운동이었다. 특히 "건강할 때 이웃을 돕고 병들었을 때 도움을 받는다"는 표어는 현재 국민건강보험제도의 기본 철학이 되고 있다.
협동조합 운동의 선구적 사례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한국 협동조합 운동의 선구적 사례이기도 했다. 채규철이 덴마크에서 배운 협동조합 정신을 한국 상황에 맞게 적용한 것으로, 민주적 운영과 조합원의 자발적 참여를 특징으로 했다.
이는 오늘날 사회적 경제나 협동조합 운동의 이론적·실천적 토대가 되었다. 정부나 대기업이 아닌 시민사회의 자발적 노력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였다.
청십자 운동의 한계와 비판
제도적 지속성의 문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1988년 해산되었다. 이는 1977년 정부 주도의 의무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면서 민간 의료보험조합의 역할이 축소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민간 주도의 사회보장제도라 하더라도 정부 정책의 변화에 따라 존폐가 결정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계층적 제한성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주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이 주요 대상이었다. 정말로 가난한 계층에게까지 혜택이 확산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는 보편적 사회보장제도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했다.
지역적 편중
청십자 운동은 주로 부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 지역에서 성공했고, 전국적 확산에는 한계가 있었다.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는데, 이는 지역사회의 공동체 문화와 종교적 기반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현재적 의미와 유산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철학적 기초
청십자 운동이 제시한 "건강할 때 이웃을 돕고 병들었을 때 도움을 받는다"는 철학은 현재 국민건강보험제도의 기본 정신이 되고 있다. 이는 의료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책임으로 보는 관점의 전환을 가져왔다.
사회적 경제의 모델
오늘날 사회적 경제나 사회적 기업 논의에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중요한 역사적 선례로 언급된다. 영리 추구가 아닌 사회적 가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 활동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의 자발적 힘
청십자 운동은 시민사회의 자발적 조직력이 얼마나 강력한 사회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정부나 대기업의 도움 없이도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상호부조 정신만으로 의미 있는 사회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청십자 정신의 계승과 발전
장기려 정신의 계승
장기려가 사망한 후에는 제자들이 '청십자 운동'으로 스승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그가 제2의 고향으로 삼은 부산에서는 '장기려길(路)'을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으며, 청십자 정신을 되새기는 다양한 기념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청십자 의료기관
현재도 전국 곳곳에 청십자라는 이름을 가진 의료기관들이 있다. 이들이 모두 과거 청십자의료보험조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청십자 정신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론: 청십자가 남긴 영원한 유산
청십자(靑十字)는 단순한 의료보험제도를 넘어서 한국 사회보장제도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한 역사적 운동이었다. 1968년부터 1988년까지 20년간 지속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건강할 때 이웃을 돕고 병들었을 때 도움을 받는다"는 상부상조 정신을 실현한 구체적 사례였다.
청십자 운동의 가장 큰 의의는 시민사회의 자발적 힘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장기려와 채규철이라는 두 사람의 만남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기독교적 사랑 실천과 덴마크 협동조합 정신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조합을 통해 성공할 수 있었다. 또한 청십자 운동은 의료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책임으로 보는 관점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는 1977년 정부의 의료보험제도 도입과 현재의 국민건강보험제도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비록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자체는 1988년 해산되었지만, 그 정신과 철학은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운동, 시민사회 활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청십자 정신의 현재적 구현을 찾을 수 있다. 21세기 한국 사회가 직면한 사회양극화, 의료 불평등, 공동체 해체 등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청십자 운동이 제시한 상호부조와 사회연대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청십자의 파란 십자가는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향한 희망의 상징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