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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본 :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로 주몽이 건국한 역사적 도읍지

by jisik1spoon 2025. 11. 5.

졸본(卒本)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주몽이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하며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로서 약 40년간 왕도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고구려가 강대한 국가로 성장하는 발판이 된 곳입니다. 졸본은 '홀본(忽本)' 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도 불렸으며, 현재 중국 랴오닝성 환런현 일대로 비정됩니다.

졸본의 위치와 지리적 환경

졸본은 현재 중국 랴오닝성 번시시 환런 만족 자치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졸본천 또는 비류수가에 도읍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혼강은 당시 졸본이라는 지역명을 따서 졸본천이라고 불렸으며, 비류수라고도 불렸습니다.

환런 지역은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 혼강과 그 지류를 따라 넓은 충적 대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이 땅이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하다"고 묘사되어 있어, 농업 생산과 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환런 분지는 해발 500미터 이상의 고지대로, 사방이 1,000미터 이상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구려 건국과 졸본

주몽은 부여에서 남하하여 졸본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졸본은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이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고 하며, 또 다른 기록에는 졸본부여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왕의 딸과 혼인하여 왕위를 이었다고 전합니다.

졸본부여는 부여족 일파가 졸본을 수도로 하여 건국한 나라로, 연타발이라는 왕이 다스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몽은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세력을 확장했으며, 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주몽은 졸본 지역의 기존 세력과 결합하여 고구려를 건국할 수 있었습니다.

기원전 37년, 주몽은 22세의 나이로 졸본천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며, 고(高)를 성씨로 삼았습니다. 처음에는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으나, 재위 4년째인 기원전 34년에 성곽과 궁실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졸본성입니다.

비류국의 복속과 다물

주몽이 졸본에 정착한 직후, 그는 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을 복속시켰습니다. 비류국은 송양이라는 왕이 다스리던 나라로, 주몽이 비류수에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살 것을 알아차리고 찾아갔다고 합니다.

송양과 주몽은 말다툼과 활쏘기로 실력을 겨루었는데, 송양은 주몽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기원전 36년, 송양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자 주몽은 그곳을 다물도(多勿都)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 지방의 주인으로 봉했습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했다고 합니다.

송양의 비류국은 후에 소노부가 되었으며, 송양의 딸은 주몽의 아들 유리왕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송양의 외손자인 대무신왕과 민중왕이 고구려 왕위에 올라 초기 고구려 왕실과 비류국계는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졸본의 성곽 - 오녀산성과 흘승골성

졸본의 대표적인 성곽은 오녀산성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위서에는 흘승골성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언급되었습니다. 오녀산성은 환런현 동쪽에 있는 해발 820미터의 오녀산 정상부에 위치한 산성으로,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녀산성은 험준한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했는데, 서쪽·남쪽·북쪽은 절벽을 천연 장벽으로 삼았고, 지세가 완만한 동쪽과 동남쪽에만 다듬은 돌로 성벽을 쌓았습니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약 4.57킬로미터에 달하며, 성 내부에서는 고구려 초기의 대형 건물지가 발견되었습니다.

흘승골성이라는 명칭은 순우리말의 음차로, '흘'은 '솔' 또는 '수리'(높다는 뜻), '골'은 '고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흘승골성은 '수릿고을' 즉 '높은 고을'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는 고구려의 국호인 고구려(高句麗)와도 연결되는 의미입니다.

오녀산성 일대에는 망강루 고분군, 상고성자 고분군, 고력묘자촌 고분군 등 고구려 초기의 돌무지무덤 고분군이 밀집해 있어, 이곳이 고구려의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2004년에는 고구려의 다른 왕성·왕릉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졸본 시대의 정치 체제

고구려 초기의 정치 체제는 부체제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삼국지와 후한서 등 중국 문헌에는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 등 5개 부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비류나부, 연나부, 환나부, 관나부 등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차 계루부로 왕권이 넘어갔다고 합니다. 주몽을 대표로 하는 계루부가 졸본부여의 맹주였던 비류국(소노부)을 복속시키면서 왕좌를 차지했던 것입니다. 고구려 초기에는 왕권과 5부의 자치권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각 부의 유력자인 대가들은 제가 회의에서 국정의 주요 사안을 논의했습니다.

졸본부여는 고조선의 원주민이었던 소노부(비류국)와 부여에서 남하한 계루부가 연합한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소서노의 아버지인 연타발은 졸본부여를 구성하는 계루부의 유력한 호족이었으며, 주몽에게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여 고구려 건국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졸본 시대의 경제와 사회

고구려 초기의 경제는 약탈 중심의 경제 체제였습니다. 오녀산성 지역은 농경에 불리한 지역이었고 인구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부여 같은 강대국의 변방에 소규모로 침입하여 말이나 소 같은 가축을 훔쳐오는 형태의 약탈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고구려에 말이 충분해지자, 대무신왕 시기부터는 본격적인 기마민족형 약탈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여, 낙랑, 대방 등 주변 국가에 침략과 약탈을 감행했으며, 전쟁터에서 화살촉, 갑옷, 병장기를 회수하는 것이 고구려 약탈경제의 기본이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고구려의 3만 호 가운데 1만 호가 좌식자(坐食者)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좌식자는 "앉아서 먹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전쟁이 없을 때는 약탈해온 물건과 백성들이 바치는 세금으로 생활하는 일종의 상비군이었습니다.

2세기 말엽으로 접어들면서 약탈의 규모와 방식은 점차 온건해졌고, 태조대왕 시절에는 약탈 중심의 군대가 정복전쟁을 위한 군대로 변모했습니다. 주변국들을 복속시키면서 영토를 넓히고 가축과 특산품의 산지를 확보하여, 보다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국내성으로의 천도

서기 2년(유리명왕 21년), 제사용 돼지가 국내로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천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 이듬해인 서기 3년(유리명왕 22년) 고구려는 국내 위나암(지금의 지안 지역)으로 천도했습니다. 졸본에서 국내성으로의 천도는 약 40년간 지속된 졸본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국내성은 압록강 유역에 위치하여 졸본보다 경제적·군사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중국 한나라 군현 세력으로부터 더 멀어지면서 국가의 위기를 최소화할 수 있었고, 압록강 유역을 장악하여 주변의 여러 세력을 직접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동옥저 지역을 비롯한 곡창지대로 진출하기 위한 육로와 수로망을 장악하여 경제적 배경을 든든히 할 수 있었습니다.

국내성은 427년(장수왕 15년)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약 400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로 기능했습니다. 국내성 시대에 고구려는 태조왕 이후 비약적으로 도약하여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졸본 기록

414년(장수왕 3년)에 건립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고구려 건국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비문에는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왕은 홀본 동쪽에서 용을 밟고 승천하셨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높이 약 6.39미터의 응회암으로 만들어진 사면비로, 4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는 시조 추모왕의 건국 설화로 시작하여 유리왕, 대무신왕 3대까지의 고구려 왕실의 연원과 광개토대왕의 업적에 대한 칭송을 담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졸본 관련 기록은 고구려 당대에 직접 남겨진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졸본이 고구려 건국의 성지로서 후대까지 기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비문에서 졸본을 '홀본'이라고 표기한 것은 '졸'과 '홀'이 같은 발음의 다른 표기임을 의미합니다.

졸본 지명의 의미

졸본의 '졸(卒)'과 '홀(忽)'은 순우리말 '솔'의 음차로, '수리'(높다)를 의미합니다. '본(本)'의 정확한 의미는 명확하지 않으나, '불' 또는 '부리'로 해석되어 '서라벌', '소부리'와 같은 의미의 지명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졸본은 '솔부리·소라불·소라부리' 정도로 해석되며, 신라의 서라벌, 백제의 소부리와 통하는 '수도'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편 흘승골성의 '흘승골'은 '슰골' 즉 '수릿고을'로 읽히며, 이를 훈음병차로 다시 쓰면 '고구려(高句麗)'가 됩니다. 따라서 졸본과 흘승골성, 고구려라는 명칭은 모두 '높은 곳의 고을'이라는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졸본의 역사적 의의

졸본은 고구려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졸본은 고구려가 처음 건국된 곳으로, 고구려 700년 역사의 출발점입니다.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하여 이곳에 터전을 잡고 고구려를 세움으로써,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아우르는 강대국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둘째, 졸본은 여러 세력이 결합하여 새로운 국가를 형성한 곳입니다.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 집단과 졸본 지역의 기존 세력인 졸본부여, 그리고 비류국이 통합되면서 고구려라는 강력한 국가가 탄생했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단순히 한 부족의 국가가 아니라 여러 집단의 연합체로 출발했음을 보여줍니다.

셋째, 졸본은 고구려의 정치·경제·문화의 기틀이 마련된 곳입니다. 5부 체제를 중심으로 한 정치 체제가 형성되었고, 약탈경제를 통해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고구려 특유의 산성 방어 체계가 시작된 곳입니다.

넷째, 졸본은 고구려인들에게 '성지'로 기억되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 건국 설화와 함께 졸본이 기록된 것은, 국내성과 평양으로 수도가 옮겨간 후에도 졸본이 고구려의 발상지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현재 졸본으로 비정되는 환런 지역의 오녀산성과 주변 유적들은 중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이는 졸본이 단순히 한국사의 유적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임을 의미합니다.

졸본은 비록 약 4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고구려의 수도였지만, 고구려 건국의 역사적 현장이자 고구려 정신의 근원지로서 한국 고대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험준한 산악 지형 속에서 나라를 세우고 주변 세력을 통합하여 강대국으로 성장한 고구려의 역사는, 졸본이라는 작은 분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