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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뮬러: 믿음과 기도로 살아간 고아들의 아버지

by jisik1spoon 2025. 5. 17.

조지 뮬러는 19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 오직 기도와 믿음만으로 수많은 고아들을 돌보고 선교 사역을 펼쳤습니다. 그는 평생 '5만 번 이상'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알려진 '믿음의 사도'로, 어떠한 재정적 후원 요청 없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브리스톨에 5개의 대규모 고아원을 설립하고 10,000명이 넘는 고아들을 돌봤습니다. 뮬러는 자신의 삶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신뢰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증명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으며, 그의 기도 중심적 삶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초기 생애와 회심

조지 뮬러(Johann Georg Ferdinand Müller)는 1805년 9월 27일 프로이센(현재 독일)의 크로펜슈테트(Kroppenstedt)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젊은 시절은 신앙과는 거리가 먼 방탕한 생활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는 도둑, 거짓말쟁이, 술꾼이었으며, 어머니가 임종할 때조차 술에 취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16세 때는 사기죄로 체포되어 3주간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뮬러의 아버지는 그가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루터교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고, 1825년 그는 할레 대학교(Halle University)에 신학생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같은 해 11월, 한 친구의 집에서 열린 기도 모임에 참석하기 전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크리스천 친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뮬러는 이후 회심하게 되었고, 그 경험을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회심 후 4년이 지난 1829년 7월, 뮬러는 또 다른 영적 전환점을 경험합니다. 그는 이것을 "온전한 마음의 항복(full surrender of the heart)"이라 묘사하며 "돈에 대한 사랑, 지위에 대한 사랑, 세속적 쾌락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고, 하나님만이 내 전부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의 원칙과 사역의 시작

1829년 뮬러는 유대인 선교 훈련을 위해 런던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건강 문제로 데본셔의 틴머스(Teignmouth)로 휴양을 떠났고, 그곳에서 평생의 친구가 될 헨리 크레이크(Henry Craik)를 만났습니다. 런던 유대인 선교회와의 결별 후, 그는 틴머스의 에벤에셀 예배당(Ebenezer Chapel)에서 목회를 시작했고, 1830년 10월 7일 앤서니 노리스 그로브스(Anthony Norris Groves)의 누이 메리 그로브스(Mary Groves)와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뮬러는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정기적인 봉급을 거부하기로 했는데, 이는 교인들이 의무감이 아닌 자발적 의지로 헌금하길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교회 좌석 임대제도도 폐지했는데, 이는 부자들에게 불공정한 특권을 주는 관행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2:1-9에 근거). 이때부터 뮬러는 "오직 기도와 자발적 기부만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1832년 뮬러는 헨리 크레이크와 함께 브리스톨로 이주해 베데스다 예배당(Bethesda Chapel)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후에 플리머스 형제회(Plymouth Brethren) 운동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고, 뮬러는 이 운동의 설립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이후 교리적 분열이 일어났을 때 뮬러가 속한 그룹은 "개방적인 형제교회(Open Brethren)"로 알려지게 됩니다.

고아원 사역

1832년 브리스톨에 정착한 뮬러는 당시 산업화로 인한 심각한 빈곤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도시를 목격했습니다. 콜레라 전염병으로 많은 아이들이 고아가 되어 길거리나 작업장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마음이 움직인 뮬러와 그의 아내 메리는 고아들을 돕기로 결심했습니다.

 

1836년, 뮬러 부부는 자신들이 임대한 윌슨가(Wilson Street) 6번지 집을 30명의 여자 고아들을 위한 숙소로 제공하면서 고아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곧 윌슨가의 세 채의 집이 더 확보되어 남자 아이들과 더 어린 아이들까지 수용하게 되었고, 결국 130명의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45년, 이웃들의 불평과 공공시설 이용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자, 뮬러는 300명의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별도의 건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하여 1849년, 브리스톨의 애쉴리 다운(Ashley Down)에 새로운 고아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후 계속 확장되어 1870년 5월 26일까지 5개의 대형 고아원 건물에서 1,722명의 아이들이 수용되었으며, 최대 2,0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가 되었습니다.

 

뮬러의 고아원은 단순한 복지시설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아침 식사 후에는 성경 읽기와 기도 시간이 있었고, 고아원을 떠날 때는 모든 아이에게 성경과 옷가지가 든 주석 상자가 제공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단정하게 옷을 입히고 교육을 받았으며, 뮬러는 높은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감독관까지 고용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교육 수준이 너무 높아 인근 공장과 광산에서는 그의 노력으로 견습생, 전문적 훈련, 가정 서비스 자리를 얻은 고아원 출신들 때문에 충분한 노동자를 확보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가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그의 기도 생활입니다. 그는 평생 "5만 번 이상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뮬러는 자신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기도로 구했으며, 어떤 후원자에게도 직접적인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의 기도 생활에는 몇 가지 뚜렷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만 의지하기
  2. 모든 죄를 고백하고 멀리하기
  3.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확신하기
  4. 인내로 기도하기
  5. 인간적 수단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만 신뢰하기

뮬러는 기도 제목을 노트에 기록하고 응답이 될 때마다 날짜와 내용을 체크했습니다. 이러한 기록 덕분에 그는 하나님의 신실한 응답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의 생애 동안 5만 번 이상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믿음의 깊이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300명의 아이들이 먹을 음식이 전혀 없었을 때, 뮬러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한번 보세요"라고 말하며 아이들을 식당에 모아 빈 그릇을 놓고 식사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곧 먹을 것을 보내 주실 줄 믿고 감사드립니다. 아멘." 기도가 끝나자마자 문 밖에서 방금 구운 빵을 가져온 제빵사와 우유를 가득 실은 수레가 고장 나 우유를 기부하러 온 사람이 나타나, 모든 아이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뮬러의 끈기 있는 장기 기도입니다. 그는 1844년 11월부터 다섯 명의 젊은 시절 친구들이 주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둘은 뮬러가 1897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에야 회심했는데, 이는 뮬러가 52년 동안 멈추지 않고 기도한 결과였습니다.

세계 선교와 후기 활동

70세가 되자 뮬러는 전 세계를 돌며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1875년부터 1892년 사이에 그는 영국, 유럽,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중국 등 42개국을 순회하며 3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17년간의 선교 여행 동안 그는 약 25만 마일을 이동했습니다.

 

뮬러는 고아원 운영 외에도 성경보급회를 설립하여 전 세계 가난한 사람들에게 성경을 배포했고, 많은 해외 선교사들을 지원했습니다. 그중에는 중국 선교사로 유명한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깊이 사랑하여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평생 100번 이상 성경을 통독했으며, 읽을 때마다 새로운 통찰과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자주 말했던 뮬러는 주님을 '사랑스런 구원자'로, 자신은 '지옥에나 합당한 죄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898년 3월 10일,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까지도 기도회에 참석할 정도로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갔으며, 결국 92세의 나이로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영향과 유산

조지 뮬러의 사역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세상을 떠나면 고아원 운영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뮬러는 "하나님이 이 종을 세상에서 영원히 떠나게 하시고 나면 내가 하나님을 의지했을 뿐 하나님이 나를 의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거요"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고아원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고아들이 줄어들 때까지 성공적으로 운영되었고, 이후 양로원이나 학교로 변환되어 오늘날까지 그 건물들이 남아있습니다.

 

뮬러는 플리머스 형제회 운동의 중요한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믿음의 사도'로 불리며 19세기 '제2의 종교 개혁'이라 불리는 이 운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의 삶과 사역은 D.L. 무디(D.L. Moody)와 같은 당대의 복음전도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중국의 워치만 니(Watchman Nee)는 뮬러의 전기를 "믿음에 관해 빛이 가득한 책"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오늘날 브리스톨에는 조지 뮬러 박물관이 있어 그의 삶과 사역을 기념하고 있으며, 그의 기도와 믿음의 원칙은 현대 기독교에서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 중 가장 큰 것은 아마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실천적 믿음의 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지 뮬러는 자신에 대해 "내 믿음은 모든 신자들의 믿음과 같다. 바로 주님의 길로 걸으며 날마다 조금씩 성장하는 그런 믿음이다. 내 믿음은 결코 특별한 믿음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그의 일관된 헌신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도전과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결론

조지 뮬러의 생애는 한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입니다. 방탕한 젊은이에서 10,000명이 넘는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기까지, 그의 삶은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이라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원칙 위에 세워졌습니다.

 

뮬러가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아마도 "믿음이란 하나님이 무언가를 말씀하실 때 나도 동일하게 말하는 것"이라는 그의 간결한 정의에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뮬러의 삶을 돌아볼 때, 그의 기도하는 무릎이 마룻바닥에 움푹 파인 자국은 단순한 일화를 넘어 한 인간이 하나님과 맺을 수 있는 친밀한 관계의 깊이를 상징합니다. "조지 뮬러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라는 말처럼, 그의 삶은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도 여전히 살아있는 도전과 격려가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