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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은 : 전국 3대 폭력조직중 '양은이파'를 이끈 전설적 인물

by jisik1spoon 2025. 6. 11.

조양은(曺洋銀, 1950~)은 1970~1980년대 한국 조직폭력배 역사에서 '양은이파'를 이끈 전설적 인물로, 김태촌의 '범서방파', 이동재의 'OB파'와 함께 전국 3대 폭력조직으로 군림했다. 그의 생애는 빈곤한 유년기에서 시작해 조직폭력배 두목으로의 성장, 반복된 수감과 출소, 종교적 회심과 재범의 순환을 거치며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을 상징한다. 2020년대 선교사로 변신한 뒤에도 법적 문제에 연루되며 '개과천선'의 한계를 드러낸 인물로 평가받는다.

성장 배경과 조직폭력배의 길

유년기와 가정환경

1950년 1월 18일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난 조양은은 농부인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 아래 성장했다. 그러나 강압적 교육 방식에 반발하며 청소년기부터 불량배 행각을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 이미 소년원을 경험했으며, 고등학생 시절에는 '화신8인조'를 결성해 지역 조직 간 갈등에 개입했다. 당시 광주 조직폭력계는 충장로파와 대호파(OB파 전신)가 양분하고 있었으며, 조양은은 충장로파 두목 전희○의 행동대장 역할을 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서울 진출과 세력 기반 구축

1960년대 후반 조양은은 후배들을 이끌고 서울로 상경하며 본격적인 주먹계 입문을 시작했다. 1970년 명동 캠퍼스다방 패싸움으로 첫 구속되며 8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고, 출소 후 조선호텔 고고클럽 관리권을 장악하며 유흥업소 장악 전략의 기반을 마련했다. 1971년 중앙정보부 간부에게 대들었다가 '괘씸죄'로 다시 구속되는 등 초기 수차례의 수감 경험은 그의 조직 운영 방식에 잔혹성을 각인시켰다.

양은이파의 부상과 3대 조직 갈등

사보이호텔 혈전과 세력 재편

1975년 1월 2일 서울 명동 사보이호텔에서 벌어진 '신상사파'와의 대결은 조양은의 전국구 입지를 공고히 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당시 범호남파 행동대장으로 참전한 조양은은 생선회칼과 야구방망이를 동원한 공격으로 맨주먹으로 맞선 신상사파를 초토화시켰다. 이 사건으로 기존 서울 토착 세력인 신상사파가 몰락하며 호남계 조직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양은은 신상사파 잔당들의 보복 위협을 받아 3년간 도피 생활을 하며 50여 명의 경호원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김태촌과의 숙명적 대립

1976년 조양은은 김태촌의 범서방파와의 갈등에서 결정적 분기점을 맞았다. 무교동 엠파이어호텔 주차장에서 벌어진 기습 공격으로 김태촌이 부상당한 사건은 두 조직 간 3년에 걸친 전쟁의 서막이었다. 이들의 대립은 1978년 화해로 일단락되었으나, 1988년 OB파 두목 이동재의 아킬레스건을 절단한 사건에서 협력하는 등 상황에 따라 동맹과 적대를 오가는 전략적 유연성을 보였다. 조직 간 갈등은 단순한 주먹다툼을 넘어 유흥업소 장악, 건설업계 불법 이권 확보 등 경제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법정 투쟁과 수감 생활

반복된 구속과 형량 누적

조양은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조직폭력배 대대적 소탕 작전으로 구속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95년 만기 출소 후 1996년 사기 혐의로 재차 구속되며 '개과천선' 선언의 허구성이 드러났다. 2022년에는 한국철도공사와의 고철 사기 사건에서 1억 5천만 원을 편취한 혐의로 지명수배되며, 2024년 범인도피 교사 혐의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는 등 만년까지 법적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교도소 내 권력 게임

수감 기간 중 조양은은 교도소 내에서도 조직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990년 순천교도소 난동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어 1년 4개월간 독방 생활을 했으며, 2004년 출소 후 인터뷰에서 "교도소 내에서조차 과거의 명성이 발목을 잡는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의 수감 기록은 총 20년이 넘으며, 소년원 경험까지 포함하면 9번의 구속을 반복한 인생사가 된다.

종교적 변신과 이중적 삶

선교사 변신과 신분 세탁 시도

1995년 출소 후 조양은은 장로회 목사 안수를 받으며 '아이야세계선교회'를 설립했다. 유튜브 채널을 통해 "감옥에서 하나님을 영접했다"는 간증을 올리며, 아프리카 선교와 노숙자 급식 등 사회봉사 활동을 홍보했다. 그러나 2022년 선교회 신도들을 동원해 채무자 협박 및 감금 사건을 벌인 사실이 드러나며, 종교적 외피 아래 양은이파의 잔재가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범죄와 종교의 경계 허문 사례

선교회 운영진 대부분이 양은이파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2022년 발생한 5억 원 차용증 강요 사건에서는 신도들이 "조양은의 직접적 지시"에 따라 움직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종교 단체를 통해 기존 조직망을 유지하며 불법적 이익을 추구한 전형적인 사례로, 2024년 법원 판결문에서도 "과거의 범죄 경력을 고려해 엄중히 처벌한다"는 판결 이유가 기재되었다.

개인사와 사회적 영향

옥중 연애와 결혼 스캔들

1995년 46세의 조양은은 29세의 김소영과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결혼식에는 200여 명의 조직원이 참석했으며, 정치인과 연예인들의 화환 20여 개가 전시되는 등, 출소 후에도 여전한 조직적 영향력을 과시했다. 2016년에는 유튜브 인터뷰를 통해 장모가 옥중 면회를 통해 딸을 소개시킨 에피소드를 공개하며, 수감 생활 중에도 인맥을 활용한 관계 형성 능력을 드러냈다.

후계 구도와 조직의 몰락

2000년대 후반 양은이파는 부산 칠성파와의 흉기 대치 사건으로 수사 당국 집중 격파 대상이 되었고, 2016년 부두목 최모씨 구속으로 구심점을 완전히 상실했다. 조양은의 빈번한 수감과 건강 악화로 인해 조직은 세대 교체에 실패했으며, 2020년대 들어서는 2~3세대 조직원들이 신종 범죄 유형으로 전환하며 전통적 조직폭력배 구조에서 벗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역사적 평가와 사회적 함의

권력과의 공생 관계

조양은의 세력 확장에는 정치권의 암묵적 후원이 작용했다. 1970년대 중앙정보부 간부 문모씨와의 갈등 사례에서 보듯, 당시 권력 기관은 조직폭력배를 치안 유지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활용·통제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1980년대 군사정권 시기 대규모 소탕은 조직폭력배를 '체제 위협 요소'로 규정한 반면, 이전 시기에는 정경유착의 도구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개인사가 반영한 시대적 아비투스

조양은의 생애는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계층이 합법적 사회 진출 경로를 상실한 채 폭력에 의존해야 했던 구조적 문제를 상징한다. 그의 반복된 수감과 재범은 '주먹으로 시작한 인생'이 사회적 편견과 경제적 유인에 의해 고착화되는 악순환을 보여주며, 2020년대까지 지속된 범죄 연루는 형사사법 시스템의 교화 프로그램 한계를 드러낸다.

결론

조양은의 70년 인생사는 한국 조직폭력사의 살아있는 증거이자 사회적 배제와 편견이 낳은 비극적 결과물로 해석된다. 그의 생애에서 드러나는 폭력의 순환 구조—가난에서 시작된 비행, 조직적 위계질서 형성, 권력과의 공생 관계, 개인적 각성의 실패—는 단순한 개인의 실책을 넘어 한국 사회가 직면한 구조적 모순을 반영한다. 양은이파의 흥망은 조직폭력배가 단순한 범죄 집단이 아니라 특정 역사적 조건이 빚어낸 사회적 현상임을 입증하며, 이 현상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경제적 격차 해소와 사회적 포용 정책의 병행이 필요함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