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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량 : 무오사화의 피해자로 신선로를 창안한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방외인

by jisik1spoon 2025. 10. 17.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정희량(鄭希良, 1469년~?)은 본관이 해주이며,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庵)입니다.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한 뛰어난 유학자이자, 무오사화의 피해를 받고 은둔 생활을 하다 신비롭게 사라진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총명하고 박학다식하며 문예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음양학에도 밝았던 학자였으며, 현재 우리가 즐기는 전통 궁중 요리인 신선로를 창안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가문 배경과 성장

정희량은 1469년(예종 1년)에 태어났으며, 명문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증조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정충석이었고,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정침(1424~1485)이었으며, 아버지는 철원부사 정연경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청주 경씨로 경간의 딸이었으며, 그는 좌찬성 대제학을 지낸 정도공 정역의 4대손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문종의 딸 경혜공주의 남편이었던 영양위 정종은 그의 종증조부 정충경의 아들로, 왕실과도 인척 관계를 맺고 있는 명문가의 후손이었습니다.

학문과 과거 급제

정희량은 조선 시대 사림파의 종조로 불리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습니다. 김종직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들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핵심 인물들이었습니다. 정희량은 1492년(성종 23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성종이 승하하자, 태학생과 재지유생들과 함께 올린 상소가 문제가 되어 해주에 유배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1495년(연산군 1년)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8위의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이듬해인 1496년에는 예문관검열에 임명되었고, 승문원의 권지부정자에 임용되었습니다. 1497년에는 김전, 신용개, 김일손 등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과 함께 사가독서에 선발될 정도로 문명이 높았습니다. 사가독서는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하게 하던 제도로, 선발되는 것 자체가 큰 영예였습니다.

관직 생활과 직간

정희량은 1497년(연산군 3년) 예문관대교로 보직되어 임금에게 여섯 가지 중요한 충언을 올렸습니다. 첫째, 임금이 마음을 바로잡아 경연에 근면할 것, 둘째, 간언을 받아들일 것, 셋째, 현사를 분별할 것, 넷째, 대신을 경대하며 환관을 억제할 것, 다섯째, 학교를 숭상하며 이단을 물리칠 것, 여섯째, 상벌을 공정히 하고 재용을 절제할 것 등을 건의했습니다. 이는 연산군의 폭정에 맞서 강직하게 충언을 올린 것으로, 그의 올곧은 성품과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498년에는 선무랑·행예문관봉교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성종실록 편찬은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영예로운 작업이었으며, 이는 그의 학문적 능력과 문장력이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무오사화와 유배 생활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정희량의 인생은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무오사화는 김일손 등이 작성한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실려 있다는 이유로 연산군이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이었습니다. 정희량은 사초 문제로 윤필상 등에 의해 신용개, 김전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난언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장 100대, 유배 3,000리의 처벌을 받고 평안북도 의주에 유배되었습니다.

 

1500년 5월에는 경상도 김해로 이배되었습니다. 유배 생활 동안 정희량은 의주와 김해 적소에서 많은 시를 지었으며, 후에 《허암집》에 수록된 328수의 시가 모두 이 시기에 창작된 것들입니다. 이 시들은 그의 내면적 고뇌와 자연에 대한 애정, 그리고 학문적 성찰을 담고 있어 문학적 가치가 높이 평가됩니다.

유배 해제와 신비로운 실종

1501년 9월 정희량은 유배에서 풀려나 직첩을 돌려받았습니다. 그러나 대간과 홍문관직에는 나갈 수 없다는 제한이 있었습니다. 같은 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경기도 고양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어머니의 분묘를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정희량은 산책을 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그 이후로 행방이묘연해졌습니다.

 

일설에는 정희량이 김포 강가에 상복과 짚신을 벗어놓고 죽은 것처럼 위장한 후 자취를 감추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갑자사화(1504년)가 일어날 것을 미리 예상하고, 홀연히 집을 나가 자신의 흔적을 지운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그는 인천 부평의 허암산에 은거하면서 수년간 머물렀으며, 이곳에서 그의 호 '허암'을 따왔다고 전해집니다. 소문이 퍼져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다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그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희량은 이름과 성을 바꾸고 전국을 방랑하며 걸식도 하고 승려가 되기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그의 아내는 오랫동안 남편을 기다리다가 나이가 많아지자 의관을 묻어 상징적인 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후에 그의 모친 경씨 묘소 아래에 의관장을 하고, 경기도 고양에 단을 쌓아 동생 희검이 그의 제사를 모셨습니다.

신선로의 창안

정희량이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전통 궁중 음식인 신선로를 창안했다는 점입니다. 신선로는 그릇 가운데 구멍에 숯불을 넣고, 그 둘레에 각종 고기, 생선, 채소 등을 넣어 끓여 먹는 조리법으로, 수화기제(水火旣濟)의 원리를 응용한 것입니다. 수화기제는 《주역》에 나오는 개념으로, 물과 불이 조화를 이루는 이치를 의미합니다.

 

정희량은 유배에서 풀려나 은둔 생활을 할 때, 뚫린 대접 모양의 그릇을 가지고 다니며 간편한 요리 기구로 삼았습니다. 그는 그릇의 구멍에 숯불을 넣고 산과 들에서 구한 채소를 물이 담긴 그릇 테두리에 넣어 익혀 먹었으며, 하루에 아침 저녁 두 끼만 그 그릇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정희량이 죽은 뒤 사람들은 그에게 신선 같은 풍모가 있었다면서 그가 창안한 화로를 '신선로'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신선로는 양반가에 퍼졌고, 궁중에서도 열구자탕용 그릇으로 사용되며 명절이나 특별한 잔치 날에 먹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선로는 구리로 만들지만, 궁궐에서는 독살을 방지하고자 은으로 만든 신선로를 사용했습니다. 신선로와 비슷한 형태의 그릇은 중국 및 중앙 아시아에도 있으나, 재료 구성이 다르며 '신선로'라는 이름 자체는 정희량의 식습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는 신선로가 중국의 훠궈르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제시되지만, 정희량의 이야기가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문학적 업적과 저서

정희량은 총명하고 박학다식하며 문예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습니다. 그의 저서로는 《허암집》이 있으며, 이는 원집 3권, 속집 3권 합 2책으로 구성된 목활자본입니다. 《허암집》 원집의 권두에는 이우의 서문과 목록이 실려 있으며, 권말에는 정광숙, 정홍석, 정면석의 발문이 있습니다. 원집 권1~3은 시집으로, 무오사화로 인해 유배 갔던 의주와 김해 적소에서 지은 시 328수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초간본은 정희량의 친구인 청해군 이우가 김사형과 함께 편집·간행한 것입니다. 중종반정 이후 이우는 정희량이 귀양살이했던 의주와 김해에서 정희량이 지은 시편을 수집하였고, 이행 등이 이우에게 출간을 권유하자 1511년(중종 6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당시 동원부사였던 김사형과 함께 초간본을 편집하고 간행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정희량 자신은 시나 글을 쓰기는 해도 전혀 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현재 존재하는 《허암집》은 그냥 묻혀버리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한 글벗들이 각각 소장하고 있던 허암의 시문들을 모아 간행한 것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것으로 알고 만든 유고집입니다.

성품과 사상

정희량은 지위나 부귀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영달에는 관심이 없었던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음양학에도 밝았으며, 노장사상과 점복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어느 학자는 허암 선생을 허무주의학파의 대표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방외인으로서의 삶과 철학은 후대의 토정 이지함, 이달과 임제를 거쳐 김삿갓 김병연으로 이어지는 방외문학의 전통을 형성했다고 평가됩니다.

 

정희량의 방외 인문학은 개인의 절대적 자유와 방일, 노장음양학과 점복, 그리고 시문을 쓰되 그 흔적을 남겨둘 필요는 없다는 허무주의로 특징지어집니다. 이러한 사상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류 유학과는 다른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며, 정치적 탄압을 피해 은둔한 지식인의 내면 세계를 반영합니다.

후손과 역사적 평가

정희량의 동생은 희검이었으며, 그의 증손자가 바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정문부입니다. 정문부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정희량의 가문이 후대에도 나라를 위해 헌신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정희량 가문의 충의정신이 대대로 이어져 왔음을 의미합니다.

 

정희량이 은거했던 곳으로 알려진 인천 부평의 허암산 북쪽 기슭에는 '허암 정희량 유허지'가 남아 있습니다. 《부평부읍지》 고적조에는 "허암구지는 모월곶면 허암산 밑에 있는데 한림학사 정희량이 복거하면서 호를 허암이라 하였으나 뒤에 자취를 감추어 끝마친 곳을 알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정희량의 호 허암은 허암산에서 취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희량은 비록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관직을 떠나야 했고 신비롭게 실종되었지만, 그가 남긴 문학적 유산과 신선로라는 문화적 유산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강직한 신하로서의 면모, 뛰어난 학자로서의 능력, 그리고 자유로운 방외인으로서의 정신을 모두 보여주는 조선 전기 지식인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오사화라는 정치적 비극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학문을 지키며, 결국 속세를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정희량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교훈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