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룡의 생애와 초기 경력
정하룡은 1933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경험한 인물입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 군사독재와 민주화의 시기를 모두 겪으며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으로 살아왔습니다. 경기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보여주었는데, 1949년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서양화 부문에 최연소로 입선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그의 예술적 감수성과 재능을 일찍부터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952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정하룡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이승만 독재와 전쟁의 참상 속에서 한국 사회의 미래를 고민하며 학문에 매진하였습니다. 서울대 재학 시절 그는 '낙산회'라는 서클에 가입하여 서구의 정치사상과 이론을 탐구하였으며, 공산주의와 반공독재 모두를 거부하는 중도적 입장을 일찍부터 형성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중도주의 사상은 그의 평생 철학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유학과 학문적 성취
1955년 정하룡은 서울대학교 졸업을 1년 앞두고 숨 막히는 이승만 독재와 니힐리즘에 기댄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당시 유럽은 전후 복구의 시기였지만 동시에 지적 르네상스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Sciences Po)에 입학하여 정치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파리정치대학은 프랑스 행정 관료들의 산실로 알려진 명문 기관이었으며, 정하룡은 이곳에서 세계적인 정치학자인 모리스 뒤베르제(Maurice Duverger) 교수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뒤베르제 교수는 정당론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였으며, 그는 제자 정하룡에게 박사 논문 주제로 '이승만 독재의 생태 분석'을 제시하였습니다. 뒤베르제 교수는 스탈린처럼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에 역행하여 '개인화'한 권력 구조를 연구하는 학자였기에, 이승만 정권의 권위주의적 성격과 자유당 체제를 분석하는 것이 학문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1959년 정하룡은 파리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그의 박사 논문 주제는 "이승만 정권 하의 한국 정당"이었습니다. 이는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파리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희귀한 학문적 성취였습니다. 그의 논문은 1966년에 정식 출판되기도 하였습니다.
통일 연구를 위한 평양 방문
프랑스 유학 시절 정하룡은 한반도 분단의 현실과 통일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상처를 입고 '절망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찾고자 했으며,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살펴 통일의 묘안을 찾아보려는 학문적 목적으로 1962년과 1965년 두 차례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였습니다. 뒤베르제 교수는 그에게 '김일성 숭배 분석' 자료도 구해볼 것을 지시하였으며, 이는 학문적 연구의 일환이었습니다.
당시 남한 당국에 알리지 않고 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었지만, 정하룡은 순수한 학문적 동기와 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이러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는 평생 두 장면을 잊지 못했는데, 하나는 융단폭격을 당한 평양의 끝없는 폐허 속에서 전봇대 하나만 서 있는 풍경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마을 사람끼리 서로를 죽인 시신이 수없이 뒤엉켜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그는 평화통일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동백림 사건과 옥중 생활
경희대학교 조교수 임용과 체포
1966년 정하룡은 파리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경희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그는 '시앙스포 출신 신예 정치학자'로 주목받았으며, 학계와 언론계에서 촉망받는 젊은 학자였습니다. 동백림 사건이 터지기 직전 그는 삼성이 운영하던 중앙일보 고위층으로부터 삼성 계열 방송사의 책임 있는 자리를 약속받고 언론인으로의 전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67년 6월, 그의 인생은 급변하게 됩니다. 박정희 정권은 1967년 6·8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고,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되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입니다.
중앙정보부는 1967년 7월 8일부터 17일까지 7차에 걸쇐 이 사건을 발표하였으며, 유럽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시인 천상병 등 문화예술인과 교수, 유학생 등 총 194명이 연루된 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정하룡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으며, 임신 중이던 부인 이순자씨도 함께 체포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재판과 사형 선고
1967년 12월 3일 선거공판에서 법원은 정하룡을 포함한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 외국환관리법 등을 적용하여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1심에서 정하룡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는 형량이 사형으로 상향 조정되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조영수, 정규명과 함께 정하룡은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피고인 가운데 실제로 간첩죄를 적용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법원은 국가보안법 위반과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의 죄목을 적용했을 뿐, 실제 간첩 활동을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변호인단은 "이 사건은 간첩사건이 아니다. 피고인들의 행위가 간첩활동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은 중앙정보부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시인 천상병은 전기고문의 후유증으로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혹행위에 대해서는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가 조사하여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 과장했다고 결론내렸습니다.
국제적 구명운동과 석방
정하룡이 추앙했던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프랑수아 모리아크(François Mauriac) 등 당대 세계적 지성들은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의 석방을 위한 구명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들의 노력과 서독 정부의 외교적 압력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은 결국 사건 관련자들을 석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69년에는 서독 대통령 특사가 방한하여 사건 관련자 6명에 대한 석방에 합의하였고, 1970년 광복절을 기해 윤이상을 비롯한 여러 관련자들이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습니다. 정하룡은 197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특별사면으로 정규명, 조영수와 함께 마지막으로 석방되었습니다. 사형수가 3년 6개월 만에 전원 석방되는 것은 간첩 사건으로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이는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조작된 것임을 방증합니다.
대한항공 시절과 국제 활동
한불경제협력과 대한항공 입사
석방 후 정하룡은 학자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사형수 전력으로 인해 학계로의 복귀는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1973년 대한항공 창업주 조중훈 회장이 그에게 프랑스 원전 기술 도입 협상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박정희 정부가 제3차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프랑스 쪽과의 경제 협력을 조 회장에게 맡겼고, 조 회장은 프랑스 행정 관료들의 산실이었던 시앙스포 출신 정하룡을 접촉하여 한불경제협력위원회에 참여시켰습니다.
정하룡은 1973년부터 2002년까지 약 29년간 대한항공과 계열사에서 근무하며 조중훈 회장의 최측근 실세로 통했습니다. 그는 대한항공 회장 비서실장, 유럽·중동본부장을 역임하였고, 한국항공 대표이사 사장직도 수행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세 차례나 사직서를 냈으나 그때마다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면서 사표가 반려되었다고 합니다. 그만둘 때도 그룹 부회장에 내정되었으나 본인이 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정부 훈장 수상
1991년 정하룡은 프랑스 고속철 테제베(TGV) 도입 교섭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을 받았습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훈장으로, 과학·산업·문화 등 각 분야에서 프랑스와 국제 사회 발전에 높이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되는 최고의 영예입니다. 이는 정하룡의 한불 경제협력에 대한 공헌을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는 또한 프랑스 정부로부터 국가공훈 훈장(Ordre National du Mérite)도 받았으며, 이는 그가 한국과 프랑스 양국 간의 경제 및 문화 교류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박정희가 밀어붙인 '경제개발'에 앞장서면서도, 그는 사회적인 지위가 안정되자 젊은 날의 자신에게 미안함을 느꼈고, 갈고닦은 통일관과 중도주의에 어긋나는 삶이기에 강박관념에 시달렸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중도주의 사상과 철학
중도주의의 의미와 실천
정하룡의 사상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중도주의'입니다. 그가 정의하는 중도주의는 단순히 좌와 우의 중간 지점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중도주의는 그저 중간지점만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옳고 유리한 쪽을 택하는 '자주'입니다. 좌·우 어느 한쪽에 항시적으로 치우치는 것은 사대주의이며 '예속'입니다"라고 명확히 정의하였습니다.
이러한 중도주의 사상은 그가 해방을 맞은 소년 시절 이데올로기로 찢기는 조국의 현실을 보며 일찍이 마음에 품은 것입니다. 1949년 경기고 1학년 때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 비보를 접하고 경교장을 찾아 눈물을 쏟으며 "한국 중도주의의 요절"을 예감했다고 회고록에 썼습니다. 서울대 재학 시절에는 "공산주의와 반공독재자 이승만을 다 싫어했던" 낙산회에 가입하여 서구의 정치사상과 이론을 탐구하였습니다.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판
정하룡은 한국 현대사가 '나는 선, 너는 악'이라는 이분법에 지배되어 왔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중간지대가 없었고, 증오감과 복수심을 부추기면 언제라도 유혈참극이 벌어졌습니다. 가학과 피학의 톱니바퀴가 서로 물리면서 복수극을 되풀이했으며, 한반도에서 자행된 대학살의 피의 진실을 밝혀내야 했건만 가학의 기억은 국가가 개입하여 이데올로기로 덮어왔습니다. 그는 이를 '망각의 죄'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는 "정치는 근본적으로 타협의 예술입니다. 두 극단을 완화할 수 있는 길이 중도주의입니다. 이런 식의 진영 상황은 정책의 불모지를 만듭니다. 정치 혐오가 만연합니다.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나쁜 역사'만 되풀이될 뿐입니다. 중간지대라는 '중심'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한국 정치의 극한 대립 상황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혁명과 개혁에 대한 견해
정하룡은 "개혁은 산문이고, 혁명은 시"라는 독특한 비유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한국 근현대사는 민중이 공명하는 시를 쓰지 못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4·19와 5·16이 혁명일 수 없는 이유는, 혁명이란 민중이 부수고 없앤 그 자리에 새것을 세워야 하지만 4·19는 새것을 세울 중심세력이 없었고, 5·16은 민중의 참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격동의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낸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는 "치졸하고 격렬하고 지리멸렬한 비난과 협박의 연속"이라며 한국 정치를 질타하였으며,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극단주의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예술 활동과 만년의 삶
화가로서의 재능과 개인전
정하룡은 학자이자 기업인이었지만 동시에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1949년 제1회 국전에서 최연소 입선을 했을 정도로 그림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때인 1952년에는 극단 떼아뜨르 리브르(자유 극장)에 가입하여 1955년 프랑스 유학을 떠날 때까지 연극 수업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2002년 대한항공에서 퇴직한 후, 정하룡은 그림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는 2002년 서울 선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2006년과 2008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두 차례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꽃과 풍경 등 주변에서 쉽게 대할 수 있는 자연의 모습을 독특한 색감과 형태로 표현한 반추상 작품들이었습니다.
미술평론가 신혜경씨는 "자연이 그에게 주는 이미지는 자신만의 간결하면서도 단아한 언어로 어원으로 다시 돌아가고픈 따뜻한 욕망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그의 작품을 평하였습니다. 옥중에서도 그림을 그리며 고난을 이겨냈다는 그는, 평생 예술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고창에서의 노년과 회고록 집필
2002년 퇴직 후 정하룡은 두 딸이 사는 미국에서 머물렀으나, 2011년 아내와 사별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전라북도 고창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고창의 '서울시니어스 고창타워'에 거주하며, 그는 91세의 나이에 자신의 회고록 『나의 20세기』를 집필하였습니다.
이 회고록은 2024년 학민사에서 출간되었으며, 단순한 사적 회고록이 아니라 변혁의 시기마다 느꼈던 사색의 산물이며 근현대사에 대한 관조입니다. 그는 "숨 쉬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과거의 본인이 살았던 역사를 다시 관조해 보고 싶어 어렵사리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토로하였습니다.
회고록에서 그는 '전쟁과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수백만 인간의 피와 한숨으로 얼룩진' 20세기를 회고하며, 자신이 역사라는 바둑판에 사석(捨石)이 되었지만, 마지막 희망은 한반도를 경영할 미래 세대가 그 사석을 활용하여 민족 대화합을 이루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회고록은 "논리가 가지런하고 가식 없는 문장"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정하룡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
시대를 앞서간 통일운동가
정하룡은 1960년대에 이미 남북 분단의 극복과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한 선구적 지식인이었습니다. 당시 냉전 체제 하에서 북한을 방문하여 실상을 파악하려 했던 그의 행동은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습니다. 비록 동백림 사건으로 인해 간첩으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후대의 평가는 그가 순수한 학문적 동기와 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행동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위원회는 동백림 사건이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확대, 과장된 사건이라고 결론지었으며, 불법 연행과 가혹 행위에 대해 정부가 사과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는 정하룡을 비롯한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도주의 사상가로서의 유산
정하룡이 평생 견지한 중도주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입니다. 극단적 대립과 이분법적 사고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그의 중도주의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중도주의를 단순한 중간 지대가 아니라 '자주'의 정신으로 정의하였으며, 이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91세의 고령에 출간한 회고록 『나의 20세기』는 한국 현대사를 살아낸 한 지식인의 증언이자, 후대에게 남기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그의 삶과 사상은 격동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합니다.
다재다능한 르네상스형 인물
정하룡은 학자, 예술가, 기업인, 외교관을 모두 겸비한 르네상스형 인물이었습니다. 정치학 박사로서의 학문적 성취, 국전 입선 화가로서의 예술적 재능, 대한항공에서의 성공적인 경영 활동, 한불 경제협력의 중추적 역할 등 다방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국가공훈 훈장을 받은 것은 그의 국제적 활동과 공헌이 인정받은 것입니다. 이는 정하룡이 단순히 한국의 지식인이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정하룡의 주요 생애 연표
| 연도 | 주요 사건 |
|---|---|
| 1933년 | 강원도 강릉 출생 |
| 1949년 | 제1회 국전 서양화 부문 최연소 입선 |
| 1952년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 입학, 극단 떼아뜨르 리브르 가입 |
| 1955년 | 프랑스 유학 출국, 파리정치대학 입학 |
| 1959년 | 파리대학교 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논문: 이승만 정권 하의 한국 정당) |
| 1962년, 1965년 | 학문 연구 목적으로 평양 방문 |
| 1966년 | 경희대학교 조교수 임용 |
| 1967년 6월 | 동백림 사건으로 체포 |
| 1967년 12월 | 1심에서 사형 판결 |
| 1970년 12월 | 크리스마스 특별사면으로 석방 |
| 1973년~2002년 | 대한항공 근무 (회장 비서실장, 유럽·중동본부장, 한국항공 사장 등) |
| 1991년 |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상 |
| 2002년 | 대한항공 퇴직, 서울에서 첫 개인전 개최 |
| 2006년, 2008년 | 미국에서 개인전 개최 (총 3회) |
| 2011년 | 부인 사별, 한국 귀국하여 고창 거주 |
| 2024년 | 회고록 『나의 20세기』 출간 |
맺음말
정하룡은 1933년 출생하여 2024년 현재 91세의 나이로 전라북도 고창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 독재와 민주화, 경제개발과 산업화를 모두 경험한 그는 이 모든 과정에서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능동적 참여자였습니다.
사형수에서 대기업 임원으로, 간첩 누명을 쓴 죄인에서 프랑스 정부 훈장을 받은 국제적 인사로, 좌절한 학자에서 존경받는 중도주의 사상가로 변모한 그의 인생은 극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합니다. 무엇보다 9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회고록을 집필하여 후세에 자신의 경험과 사상을 전달하려는 그의 노력은 진정한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하룡이 강조한 중도주의는 오늘날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가치입니다. "상황에 따라 옳고 유리한 쪽을 택하는 자주"로서의 중도주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타협의 예술"이라는 그의 통찰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그의 삶이 보여주는 것은 한 개인의 신념과 용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입니다. 정하룡의 생애와 사상은 한국 현대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는 살아있는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