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권력의 중심에는 때로 혈연과 혼인으로 맺어진 복잡한 인간관계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세조부터 성종에 이르는 시기, 조선 왕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관계 중 하나는 바로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사돈 관계입니다. 이 두 인물은 각자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전략적으로 손을 잡았으며, 그 결과 성종이라는 왕을 탄생시켰습니다.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배경
인수대비 한씨(1437~1504)는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아내로, 본래 왕비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 의경세자가 1457년 만 18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그녀의 왕비로 가는 길은 좌절되었습니다. 당시 21세였던 인수대비는 궁에서 나가 사가에서 세 자녀를 키우며 지내야 했습니다. 첫째 아들 월산대군, 딸 명숙공주, 그리고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훗날 성종)이 바로 그 자녀들입니다.
인수대비의 친정 아버지 한확(1403~1456)은 조선 제일의 중국통으로 명나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한확의 누나들이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된 덕분에 그는 명 성조로부터 광록시소경이라는 벼슬을 받았으며, 조선과 명나라 외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한확이 수양편에 선 것도 딸 때문이었으며, 정난 1등 공신에 책봉되었습니다.
한편 한명회(1415~1487)는 한확과는 9촌 관계로 먼 친척이었지만, 계유정난의 실질적 설계자로서 세조 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한명회는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한 후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으나, 수양대군을 만나면서 그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수양대군에게 30여 명의 무인들을 천거하고 계유정난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전략적 혼인 동맹의 시작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사돈 관계는 양측 모두에게 절실한 필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세조 사후, 궁에서 쫓겨나 사가에서 지내던 인수대비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명회의 집을 자주 방문했는데, 한명회는 그녀에게 야심이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이에 한명회는 인수대비에게 사돈을 맺는 조건으로 그녀의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겠다고 제의했습니다.
1467년 1월,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과 한명회의 넷째 딸이 혼인했습니다. 당시 자을산군은 11살, 한명회의 딸(훗날 공혜왕후)은 12살이었습니다. 이 혼인은 세조의 의향이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실제로는 인수대비가 피접을 나갔다가 한명회의 수양딸을 눈여겨보고 며느릿감으로 골랐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혼인 동맹의 의미는 명확했습니다. 한명회는 조선 최고의 권신으로서 막강한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고, 인수대비는 세조의 며느리로서 왕실 내부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합은 권력의 정점을 향한 공동의 목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종 즉위와 한명회의 역할
1469년 예종이 즉위 1년 2개월 만에 급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예종에게는 3살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고, 인수대비의 큰아들인 월산대군도 있었지만, 결국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는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 협약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한명회는 예종의 장인이기도 했으나 3살짜리 손자 제안대군 대신 12살짜리 사위 자을산군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철저히 계산된 정치적 선택이었습니다. 어린 왕을 옹립하면 자신이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사위를 통해 외척으로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희왕후 역시 예종이 갑자기 죽었을 때 제안대군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에게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월산대군이 있었음에도 자을산군을 즉위시킨 것은 정희왕후 개인의 결단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한명회의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정희왕후는 어린 왕의 왕권을 뒷받침해줄 실세 한명회를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바로 한명회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정치적 협약으로 이례적으로 후계서열 3위의 자을산군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는 조선 역사에서 드문 사례로, 권신의 힘이 왕위 계승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줍니다.
성종이 즉위하자 한명회는 왕의 친부인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으며 종묘에 부묘하는 과정을 주도했습니다. 신료들 대부분은 의경세자를 추존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명나라에 주청하는 문제는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한명회는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덕종을 종묘에까지 부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를 통해 한명회는 다시 한 번 왕실 척족으로서의 위상을 확인했습니다.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권력 관계
성종 즉위 후 인수대비는 대비로 진봉되었고, 한명회는 판이조사와 판병조사를 겸하며 막강한 권력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미묘하게 변화했습니다. 처음에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했지만, 성종이 성장하고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면서 권력 구도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한명회는 성종의 친정이 시작되기 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거듭에 반대 의견을 표명했습니다. 이는 뜻하지 않게 성종의 친정을 반기지 않는 사람으로 비춰졌고, 유자광을 비롯한 대간들이 한명회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결국 한명회는 좌의정에서 면직되었습니다.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관계도 미묘했습니다. 성종 즉위 후 한명회가 대비진봉을 반대하자 인수대비와 한명회는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인수대비는 본인을 대비로 만들어 줄 인물로 한명회를 선택하면서 스스로 사돈을 맺었지만, 한명회의 이러한 태도에 실망했을 것입니다. 이는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에게도 여파가 미쳤습니다.
인수대비는 며느리들에게 무척 엄격한 시어머니였습니다. 그녀는 공혜왕후에게 중국의 현모양처들에 관한 이야기인 《열녀전》을 읽게 하는 등 유교 윤리에 따라 철저히 교육했습니다. 공혜왕후가 성종과 동침하려고 하자 인수대비는 상중임을 핑계로 무마시켰고, 정식으로 왕비로 책봉시키려는 정희왕후의 뜻에도 반대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아들과 엄연히 혼인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새 왕비를 간택하려 했습니다.
공혜왕후의 요절과 권력 변화
1474년 한명회의 딸이자 성종의 왕비였던 공혜왕후가 후사도 없이 1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공혜왕후는 1473년 음력 7월에 병으로 친정인 한명회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성종이 하루 걸러 한명회의 집에 들러 그녀의 상태를 살폈습니다. 회복하여 궁궐로 돌아왔으나 12월에 병이 다시 도졌고, 1474년 음력 3월 구현전으로 처소를 옮긴 후 4월 15일 훙서했습니다.
공혜왕후의 죽음은 한명회에게 큰 타격이었습니다. 딸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요절했기 때문에 한명회는 성종과의 혈연적 연결고리를 잃었습니다. 성종이 성년이 되면서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한명회의 처지도 예전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공혜왕후 사후 성종은 후궁 윤씨를 왕비로 책봉했습니다. 이는 한명회와 인수대비에게 모두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인수대비는 유교적 덕을 강조하고 실천했지만, 중전이 된 윤씨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습니다. 이후 윤씨가 성종의 총애를 엄귀인과 정귀인에게 빼앗기자 주술 행위를 하고 극약인 비상이 발린 곶감을 가지고 있다가 발각되었습니다.
폐비 윤씨 사건과 한명회의 입장
1479년 성종은 윤씨를 폐출하기로 결심하고 대신들을 소집하여 중궁 폐출의 교지를 내렸습니다. 영의정 정창손, 상당부원군 한명회, 청송부원군 심회, 광산부원군 김국광, 우의정 윤필상이 이에 참석했습니다. 많은 이가 악독한 시어머니 인수대비가 자신의 며느리 윤씨를 쫓아냈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녀의 폐비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주도한 것은 성종 본인이었습니다.
비단 성종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 인수대비, 할머니 정희왕후까지 나서서 폐위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는데, 이는 신하들의 반대가 워낙 거셌기 때문입니다. 왕이 영원히 살 것도 아니고 그 다음에는 폐비의 아들인 원자(연산군)가 왕위에 오를 텐데, 그 원자의 어머니의 폐위와 사사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사면 멸문지화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한명회는 폐비 윤씨의 폐출에 공식적으로 참여했지만, 그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이미 자신의 딸이 죽고 성종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았던 한명회로서는 성종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1482년 폐비 윤씨가 사사되었고, 이는 훗날 연산군이 폭군이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명회의 말년과 압구정 사건
한명회의 권세는 1476년 압구정 사건을 계기로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한명회는 한강가에 '압구정'이란 정자를 지었는데, 이는 중국 송나라 재상 한기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그의 서재 이름을 '압구정'이라고 했던 고사에서 따온 것입니다. 세상을 다 버리고 강가에서 갈매기와 아주 친근하게 지낸다는 뜻이었습니다.
1484년 한명회가 70세였을 때 그의 정자 압구정이 화려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명나라와 일본의 사신들이 와서 구경하려고 했습니다. 한명회는 압구정을 더 화려하게 꾸미려고 궁중에서만 쓰는 용봉차일을 치려 했지만, 성종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한명회는 노골적으로 좋지 않은 기색을 보였고, 아내가 아프다는 핑계로 명나라 사신 접대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성종은 한명회가 오랜 사행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한나절 행사에 아내의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은 것은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성종은 이러한 무례함에 대해 분노하여 한명회에게 내린 부원군의 직첩을 거두고 도성 밖에 부처하라고 명했습니다. 이 사건은 한명회가 조선 정계의 주류이자 배후 실세에서 사실상 완전히 실각하게 된 결정적 장면으로 꼽힙니다.
쓸쓸한 여생을 보내던 한명회는 압구정 사건 6년 후인 1487년 73세의 나이로 병환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1504년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복수를 위해 갑자사화를 일으켰고, 한명회는 윤씨의 폐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를 당했습니다. 이미 죽은 지 17년이 지난 그의 무덤이 파헤쳐져 시체가 토막나고 한양 저잣거리에 목이 효수되었습니다.
인수대비의 말년과 연산군
공혜왕후가 죽고 윤씨가 왕비가 되었다가 폐출되고 사사된 후, 인수대비는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녀는 성종에 대한 글을 쓸 정도로 지식인이었으며, 왕실 여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39세에 《내훈》이라는 책을 편찬했습니다.
《내훈》에서 인수대비는 "나라의 치란 흥망이 비록 남자에게 달려 있지만 부인의 착하고 그렇지 않음에도 연결돼 있으니 부인도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강조한 성리학 이념은 남존여비였습니다. "아내가 비록 남편과 똑같다고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남편이 때리거나 꾸짖는 일이 있어도 당연히 받들어야 할 뿐 어찌 감히 말대답하거나 성을 낼 것인가"라고 말했습니다.
1494년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인수대비는 인수대왕대비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러나 폐비 윤씨를 사사시키는 데 기여한 대왕대비는 손자 연산군으로부터 어머니를 죽인 원망을 받았습니다. 장성한 연산군은 자신의 친모가 죽은 사연을 알게 되고, 당시 자신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았던 엄숙의와 정숙의의 아들들에게 자신의 모친을 때리게 하고 그녀들을 죽인 뒤 젓갈을 담가 산과 들에 버렸다고 합니다.
이런 연산군과의 끝없는 갈등을 겪은 인수대비는 결국 병이 들어 1504년 창경궁 경춘전에서 68세(일설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연산군은 "나라에는 특별히 이렇다 할 일이 없고 다만 자친으로 섬겼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인수대비의 위상을 격하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1506년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습니다.
인수대비와 한명회 관계의 역사적 의미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사돈 관계는 조선시대 권력 정치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손을 잡았고, 그 결과 성종이라는 성군을 배출했습니다. 성종은 세조가 추진한 경국대전을 완성했고, 조선의 기본 통치 방향과 유교적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단순한 성공 스토리가 아니었습니다. 한명회는 계유정난이라는 정통성 없는 왕위 찬탈에 가담했고, 수많은 사람을 탄압했습니다. 그는 군사를 지휘해 국경을 막기도 하고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는 등 업적도 많았지만, 본인의 권력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켰습니다.
한명회의 대표적 업적으로는 오가작통법과 면리제가 있습니다. 세조 대에 오가작통법을 만들면서 면리제를 실시했고, 오가작통법은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습니다. 면리제는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일제강점기와 현대 남한과 북한의 행정 제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악용해 치부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으고 비정상적인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인수대비 역시 복잡한 평가를 받습니다. 그녀는 《내훈》을 통해 조선 여성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남존여비 사상을 강화하여 여성을 억압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또한 며느리 폐비 윤씨를 내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는 훗날 연산군의 폭정으로 이어졌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권력을 위한 정략적 동맹이었지만, 그 결과는 복잡했습니다. 성종이라는 성군을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많은 희생과 비극을 낳았습니다. 한명회는 죽어서도 부관참시를 당했고, 인수대비는 손자 연산군으로부터 원한을 샀습니다. 이는 권력이 얼마나 무상한 것인지, 그리고 정치적 야심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입니다.
조선시대 권력의 정점에 섰던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사돈 관계는 한국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복잡한 인간관계 중 하나입니다. 이들의 전략적 동맹은 성종이라는 왕을 탄생시켰지만, 동시에 권력의 덧없음과 정치적 야심의 대가를 보여주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