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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이자 문인으로 '간서치'로 불린 책 읽기의 대가

by jisik1spoon 2025. 10. 25.

이덕무의 생애와 가문 배경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문인으로서, 영조와 정조 시대를 살았던 북학파의 핵심 인물입니다.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 등 여러 호를 사용했습니다. 특히 '간서치(看書痴)'라는 별호로도 유명한데, 이는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으로 그의 독서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애칭입니다.

이덕무는 조선 제2대 임금 정종의 막내 아들인 무림군 이선생의 10대손으로, 왕실의 후예이지만 서얼 출신이었습니다. 증조부는 이상함, 조부는 강계부사를 지낸 이필익, 아버지는 통덕랑 이성호였습니다. 어머니는 반남 박씨로 아산현감 박사렴의 따님이었습니다. 1741년 음력 6월 11일 서울 중부 관인방 대사동(현재의 인사동 4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덕무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가문은 천안군에 쌀 십여 섬을 수확하는 전장이 고작이었고, 이마저도 소작을 주고 있어 부모와 두 동생을 모시고 사는 삶은 매우 빈곤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난 속에서도 이덕무는 학문에 대한 열정을 꺾지 않았습니다.

학문적 성장과 독서에 대한 열정

이덕무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이성호에게서 『십구사략』을 배웠는데, 이는 중국의 태고에서부터 원나라까지의 19사를 요약한 사서였습니다. 어린 이덕무는 이 어려운 사략을 배울 때마다 완전하게 이해하여 부친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여 질병이 많았으므로 독서를 부지런히 할 수 없어 강론하고 학습하는 것이 고루하였다"고 고백했지만, 실제로는 21세가 되기까지 하루도 고서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공부했습니다.

이덕무의 독서에 대한 열정은 극도의 가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목구심서』에서 "지난 경진년과 신사년 겨울에 내 작은 초가가 너무 추워서 입김이 서려 성에가 되어 이불깃에서 와삭와삭 소리가 났다. 나의 게으른 성격으로도 밤중에 일어나서 창졸간에 『한서』 1질을 이불 위에 죽 덮어서 조금 추위를 막았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며칠을 굶주리다 『맹자』를 전당포에 팔아먹은 이야기" 등 그의 절박한 가난과 그럼에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삶의 훈기가 생생히 담겨 있습니다.

독학으로 경서와 사서 및 고금의 기문이서에 통달한 이덕무는 평생 읽은 책이 2만 권이 넘을 정도로 박학다식했습니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지만 동창, 남창, 서창이 있어 동쪽, 서쪽으로 해를 따라 밝은 데에서 책을 보았습니다.

북학파 실학자로서의 활동

이덕무는 북학파 실학자들과 깊이 교유하며 실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홍대용 등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연암 박지원과는 30년지기 친구였습니다. 1776년 이덕무는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와 함께 사가시집 『건연집』을 내어 문명을 떨쳤으며, 이들은 사가시인(四家詩人)으로 불리며 그 명성이 중국 청나라에까지 알려졌습니다.

1778년(정조 2년) 이덕무는 서장관 심염조를 수행하여 박제가와 함께 청나라를 방문했습니다. 이때 청나라에서 기균, 반정균, 이조원, 이정원 등의 석학과 교류하며 여러 자료 및 고증학 관련 저서를 가져와 그의 학문을 발전시켰습니다. 귀국 후 북학을 제창하였으며,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경서의 고증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언어 등의 분야를 연구했습니다.

이덕무의 문장 실력은 뛰어나서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였습니다. 중국 청나라 문인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의 시가 중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777년부터였습니다. 1776년 유련이 서호수의 수행원으로 중국을 방문하면서 이덕무와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4명의 시를 담은 『한객건연집』을 청나라의 저명한 시인이자 학자인 이조원과 반정균에게 소개했고, 이 책이 1777년 청나라에서 『한객건연집』으로 간행되었습니다.

규장각 검서관으로서의 활동

1779년(정조 3년) 이덕무는 39세의 나이에 드디어 관직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여 검서관을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과 함께 초대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가장 명망 있는 서얼 출신 학자들이었으며, '4검서관'이라 불리며 실학 보급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덕무는 14년간 규장각에서 근무하면서 많은 서적의 정리와 교감에 종사했습니다. 규장각에서 진행한 서적 편찬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도서집성』, 『국조보감』, 『대전통편』, 『규장각지』, 『홍문관지』, 『규장전운』, 『기전고』 등 많은 서적을 교감, 정리했습니다. 특히 1790년 정조의 명을 받아 박제가, 백동수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재직 중 이덕무는 규장각 경시대회에서 여러 차례 장원하여 1781년 내각검서관으로 옮긴 후 사도시주부, 사근도찰방, 광흥창주부, 적성현감을 차례로 지냈습니다. 사근도찰방 재임시절에는 공채의 이자 폐지를 건의하여 정조의 허락을 받기도 했습니다.

문학적 성취와 창작 활동

이덕무는 뛰어난 문인으로서 다양한 장르의 글을 남겼습니다. 그의 문학관은 '도문일치'라는 유학의 전통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문인이 문학 행위보다 유학의 덕목을 실행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덕무 시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동심의 시를 썼습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솔직하고 거짓 없는 감성이 담겨있었습니다. 둘째, 일상의 시를 썼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각자 나름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며 일상생활에 마주하는 모든 것이 소재요 주제였습니다. 셋째, 개성적인 시를 썼습니다. 옛사람이나 다른 사람을 모방하지 않고 자신의 색깔이 담긴 시를 썼습니다. 넷째, 실험적인 시를 썼습니다. 새로운 글을 쓰는 것이 창작이라고 여겼습니다. 다섯째, 조선의 시를 썼습니다. 박지원은 이덕무의 시야말로 조선 사람이 쓴 조선의 시이기 때문에 마땅히 조선의 국풍으로 삼아야 한다고 평가했습니다.

소품문 작가로서도 이덕무는 탁월했습니다. 그의 소품문은 창신과 개성을 중시하는 문학관과 함께 엄청난 분량의 작품 편수, 광범한 분야의 다채로운 제재, 서정적인 표현, 섬세하고 감각적인 묘사로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중국 공안파의 문학을 수용하여 새로운 문체 실험을 시도했으며, 자연 생태의 발견과 글쓰기, 동물 생태의 서사적 현장성 등이 특징적입니다.

주요 저술과 『청장관전서』

이덕무의 저술은 아들 이광규에 의해 『청장관전서』로 집성되었습니다. 『청장관전서』는 이덕무가 지은 71권 33책 분량의 방대한 저술을 총칭하는 이름으로, 정조 19년(1795) 내탕금을 받아 아들 이광규가 편집, 간행했습니다. 이 전서에는 저자의 다양한 지적 편력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당시 조선의 문화역량과 문예수준뿐 아니라 문화계의 새로운 움직임을 들여다볼 수 있는 한 통로가 됩니다.

『청장관전서』는 20여 종의 다양한 저술로 이뤄져 있습니다. 자신의 시문을 모은 『영처고』와 『아정유고』 외에 『예기억』과 아동용 역사교과서인 『기년아람』, 예절과 수신에 관한 규범을 적은 『사소절』 등이 있습니다. 이밖에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는 일상 견문을 통한 삶의 깨달음을 적은 경구나 일화를 기록한 향기 나는 글모음이고, 『청정국지』는 일본의 역사 문화 및 풍속 언어를 기록한 일본 보고서입니다.

특히 『이목구심서』는 제목에 나타난 바대로 귀로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입으로 말한 것,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적은 것입니다. 여러 가지 서적을 읽으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초출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선비의 진솔한 생활감정과 인간적인 정감이 감도는 생활철학이 깃들어 있는 저작입니다.

『사소절』과 실용적 교육관

이덕무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소절』(1775)은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예절과 수신에 관하여 저술한 수양서입니다. 이 책은 「부의」 2권, 「동규」 1권의 3편으로 나뉘며, 성품과 행실, 언어생활, 의복과 음식, 행동거지 등에 걸쳐 선비가 알아 둬야 할 작은 예절을 소상하게 기록했습니다.

이덕무는 주희의 『소학』을 모범으로 하되 18세기 조선의 현실에 맞게 변용한 규범서로써 『사소절』을 기획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전·사서·성리서·조선 선유의 저작, 『명유학안』·『뇌고당척독신초』 등 및 다양한 필기잡록과 총서류를 비롯한 명청대 서적, 이덕무 개인의 견문 정보 등 총 세 가지 계통의 지식 정보가 습합되었습니다.

『사소절』에는 현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대목이 많습니다. '관직을 받은 사람을 축하할 때 봉급을 물어보지 말라', '남녀관계를 정리할 때는 단호하게 하라', '밥상이 차려지면 다른 사람이 기다리거나 음식을 제때 먹지 못하도록 지체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이 신이 나서 이야기하면 아는 이야기라도 끝까지 들어주어라' 등의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문체반정과 말년의 시련

이덕무의 말년은 문체반정으로 인한 고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청나라 학문에 대한 관심은 말년의 이덕무에게 고난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덕무는 박지원, 박제가 등과 함께 저속한 청나라의 문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문체반정에 걸려 곤경에 처했습니다. 이로 인해 18세기 문단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져주었고, 당대의 사회와 문화에 끼친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정조와의 관계와 사후 영향

정조는 이덕무를 유난히 아껴 그가 죽은 뒤에도 그를 잊지 않고 때때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덕무의 명성이 정조에게까지 알려져 1779년에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와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이 되었으며, 14년간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각신을 비롯한 국내 학자들과 교유할 수 있었습니다.

1793년(정조 17년) 음력 1월 25일, 이덕무는 53세의 나이로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일생을 기록한 행장을 연암 박지원이 지었으며, 사후 이덕무 본인이 정선한 『아정유고』가 정조 임금의 특명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이덕무의 학문적 영향은 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아들 이광규는 이덕무의 저술을 묶어 『청장관전서』를 펴냈고, 손자 이규경 역시 뛰어난 학자로 문집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남겼습니다. 또한 이덕무의 박물학적 고증학은 훗날 정약용, 김정희 등에게 학문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덕무 문학과 사상의 특징

이덕무의 문학과 사상은 개방성, 확장성, 혁신성, 창의성이라는 네 가지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옛사람의 글을 모방하는 것을 가짜이고 죽은 시라고 비판하며, 비록 거칠고 조잡하더라도 자신만의 감성, 비유, 뜻이 담긴 시야말로 진짜이고 살아 있는 시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덕무는 사람의 성품을 어떤 책을 읽는가, 존경스러운 인격자를 어떻게 대하는가, 바른 충고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등 세 가지 기준으로 판단했습니다. 또한 사람을 판단할 때는 비슷한 성품을 잘 분별해야 한다고 권했으며, '장점에 따라 단점을 용납'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현대적 의의와 평가

이덕무는 조용하지만 강한 학자였습니다. 스스로 '간서치'라고 할 정도로 온갖 서적을 두루 읽고 이해했으며, 경사와 문예로부터 경제, 제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글은 단정하면서도 정감 있고,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특징을 보입니다.

이덕무의 소품문은 당대 글쓰기의 관습과 전범을 거부하고 혁신적인 경향의 글쓰기를 시도하여 18세기 문단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져주었습니다. 최근 들어 조선후기 소품문에 대한 연구가 왕성하게 진행되면서 이덕무 소품문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덕무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선비는 사회의 지배층이 아니라 인간적 성숙을 먼저 실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강조한 '남에 대한 배려'라는 기본 태도는 현대사회에서도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이처럼 이덕무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문인으로서, 책 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으며, 그의 학문적 업적과 문학적 성취는 오늘날에도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간서치'라는 별호로 상징되는 그의 독서에 대한 열정과 창의적인 글쓰기 정신은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