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그래함(Billy Graham, 1918-2018)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로,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기독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는 60여 년간 185개국 이상에서 약 2억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했으며, 라디오와 텔레비전, 영화 등 매스 미디어를 통해 수십억 명에게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출생과 어린 시절
빌리 그래함은 1918년 11월 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럿 부근의 농촌 지역에서 윌리엄 프랭클린 그래함 시니어와 모로우 커피 사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신혼 첫날밤부터 자신들의 생애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어린 시절 빌리는 장난이 심했으나 부드럽고 온화한 소년이기도 했습니다. 집안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으며, 빌리는 축구와 야구, 달리기를 즐겼습니다. 독서를 좋아하여 14세 때는 역사책을 포함해 100여 권의 책을 읽을 정도로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습니다.
신앙의 전환점과 교육
빌리 그래함은 믿음이 독실한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지만, 16세 때 중요한 영적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유명한 복음주의 전도사였던 밥 존스의 집회에 참석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회심했습니다. 이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날로 더해갔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말 잘하는 아이'로 알려졌던 빌리는 18세 때 몬로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회개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역할을 맡으며 설교의 재능을 나타냈습니다. 1936년 샬럿 고등학교를 마치고 플로리다 성경학교에 입학했으며, 1940년에는 휘튼대학교에 입학하여 주목할 만한 설교가로 주목받았습니다. 휘튼대학에서 그는 중국 선교사의 딸이었던 루스 벨(Ruth Bell)을 만나 1943년에 결혼했습니다. 루스 여사는 일제 때 북한 지역에서 자랐으며 평양 외국인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어, 훗날 빌리 그래함의 한국 및 북한 방문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도자로서의 시작
1939년 21세의 나이로 남침례교 목사 안수를 받은 빌리 그래함은 처음에는 일리노이 주 웨스턴 스프링스에 있는 조그만 개척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1945년부터는 YFC(기독청년회) 단체의 순회 전도자로 활동하며 미국 거의 모든 주와 캐나다 전 지역을 순회하면서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1946년에는 영국에서 360회의 설교를 했습니다.
1949년 로스앤젤레스 집회: 세계적 명성의 시작
빌리 그래함이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로 부상한 결정적 계기는 1949년 로스앤젤레스(LA) 중심가에서 열린 대규모 전도 집회였습니다. 당초 3주로 예정되었던 이 집회는 거대한 천막 속에서 엄청난 청중을 동원하면서 8주로 연장되었고, 약 35만 명이 참석하여 6,400명의 결신자가 나왔습니다.
이 집회에서 빌리 그래함은 복잡하지 않고 명료하며 평이하고 단순한 설교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분명하게 강조했습니다. 그의 박진감 넘치는 연설은 청중을 사로잡았고, 미디어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영향으로 수많은 신문과 방송이 그를 주목하면서 31세의 나이에 미국을 대표하는 젊은 부흥사로 부상했습니다. LA 전도대회는 빌리 그래함 목사와 그의 사역이 미국 내 전국적인 관심을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BGEA) 설립과 미디어 사역
1950년 빌리 그래함은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 BGEA)를 창립했습니다. BGEA는 전 세계에 라디오, 텔레비전, 잡지, 영화 등을 통해 그의 설교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현재 BGEA는 478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드니, 런던, 파리, 홍콩, 도쿄 등 전 세계 주요 도시에 국제 사무소를 두고 있습니다.
특히 1950년 11월 5일부터 시작된 라디오 프로그램 'Hour of Decision(결단의 시간)'은 빌리 그래함의 복음 사역을 전 세계로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30분 주간 프로그램은 ABC 네트워크를 통해 150개 이상의 방송국에서 생방송되었으며, 클리프 배로우스가 진행하고 빌리 그래함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프로그램 시작 자금인 25,000달러(현재 가치 약 25만 달러)가 하룻밤 사이에 기적적으로 모금된 일화는 유명합니다. 이 라디오 방송은 63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전 세계 수백 개 방송국에서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방송되었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방송과 출판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라디오, TV, 신문, 서적 등 미디어를 적극 활용한 선구자였으며, 이를 통해 직접 만나지 못한 수십억 명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주요 전도대회와 세계적 영향력
빌리 그래함은 1954년 영국 런던 전도대회와 1957년 미국 뉴욕 전도대회를 거치면서 '현대 복음주의 리더'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습니다.
1957년 뉴욕 맨해튼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집회는 원래 6주 예정이었으나 3주 연장되어 총 10주 동안 계속되었으며, 연인원 235만 명이라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 역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10만 명 이상이 모였고 외부에서 2만여 명이 확성기로 설교를 들었습니다. 1965년 교황 방문 때보다도 더 많은 인파가 모였으며, 집회 비용 250만 달러는 헌금으로 충당하고도 남았습니다.
1963년 로스앤젤레스 전도대회에서는 마지막 날 밤 13만 4천여 명이 모였고, 2만 명 이상이 밖에서 설교를 경청했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60년부터 90년까지 30년간 이어진 '4차 대각성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부흥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과의 깊은 인연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한국과 매우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1952년 12월 한국전쟁 중에 처음 한국을 방문하여 부산과 대구, 서울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부산 집회에는 함태영 부통령이 참석했으며, 12월 17일 야외집회와 18일 마지막 집회에는 8,000명이 모였습니다. 서울에서는 한경직 목사가 담임하던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의 통역으로 집회를 가졌습니다. 성탄절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하고 최전방 미군 장병들을 위문하며 성탄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한국 방문 중 쓴 일기를 바탕으로 "당신 아들을 전쟁터에서 보았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하여, 판매 수익 전액을 한국전쟁 구호금과 선교비로 한국에 보냈습니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흘린 모든 눈물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울었다"며 "이런 경험이 나의 삶을 바꿨다"고 고백했습니다.
1958년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 대통령 등 당시 정부 요인이 참관한 가운데 집회를 개최했습니다.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전도집회는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김장환 목사가 통역을 담당했습니다. 마지막 날 집회에는 110만 명의 성도들이 모여 빌리 그래함의 전도집회 역사상 최다 수가 모인 집회가 되었습니다. 5일간 연인원 약 320만-350만 명이 참석했으며, 이는 전 세계 기독교 역사상 단일 전도집회로는 최대 규모로 기록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 자신도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크고 역사적인 전도의 날이며, 한국 어느 곳에서나 영적인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감격을 표현했습니다. 이 집회를 계기로 한국교회는 '5천만 민족 복음화'라는 비전과 목표를 갖게 되었으며, 전도와 철야기도, 산기도의 열정이 일어나면서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1984년에는 한국 선교 100주년 기념대회에서도 여의도를 방문하여 설교했습니다.
북한 방문과 평화를 위한 노력
빌리 그래함은 1992년과 1994년 두 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1992년 방문은 냉전 종식 이후 북한을 방문한 첫 외국인 종교 지도자로서 국제 사회의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방북 전 조지 H.W. 부시 대통령과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을 만나 이견을 조율했고, 북한에서 부시 대통령의 메시지를 김일성 주석에게 전달하며 사실상 미 정부의 비공식 특사 역할을 했습니다.
북한 방문 중 김일성 주석을 직접 만나 성경책과 자신의 저서를 선물했으며, 김일성대학에서 강연을 하고 봉수교회에서 설교했습니다. 또한 평양의 실내 체육관에서 전도집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외가가 기독교 집안이었고, 빌리 그래함의 부인 루스 여사가 평양 외국인학교를 다닌 인연을 들어 그래함 목사 부부를 환대했습니다.
1994년 북핵 위기로 빌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 전쟁까지 계획했을 때 다시 한번 방북했으며, 이후 김일성은 핵 시설에 대한 국제 사찰 허용에 동의했습니다. 몇 달 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핵 협상을 위해 방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함 목사의 방북은 북한 선교와 구호 활동을 본격화하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7년에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부인 루스 벨 그래함 여사가 북한으로부터 초청받아 장녀 지지와 차남 네드를 대동하고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미국 대통령들의 영적 멘토
빌리 그래함은 생전에 정치에 대한 직접적 관심은 없었지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부터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12명의 미국 대통령에게 조언자이자 영적 멘토 역할을 했습니다. 대통령 선거 기간 중 후보들이 그를 찾는 것은 일종의 관례로 여겨졌습니다.
1981년 3월 30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암살 기도가 일어난 직후 워싱턴으로 날아가 부인 낸시 여사를 위로하고 기도했습니다. 지미 카터, 조지 H.W. 부시,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등은 2007년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럿에서 열린 빌리그래함전도협회 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하는 등 퇴임 후에도 지속적으로 친분을 유지했습니다.
특히 부시 일가와는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1985년 메인 주 해변에서 그래함 목사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는 중에 신앙의 전환점이 찾아왔다"고 기록했으며, "그래함 목사의 영향으로 젊은 시절 방황을 끝내고 기독교 신자로 거듭났다"고 고백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그의 95세 생일파티에 참석했으며, 타계 시 "그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기독교도와 모든 종교가 그를 그리워할 것"이라며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고 추모했습니다.
2002년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여왕은 "그래함 목사의 선교활동이 영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갤럽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남성' 4위에 오르는 등 최근까지도 대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10인'에 50회 이상 선정될 만큼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지도자였습니다.
설교의 특징과 사역의 비결
빌리 그래함의 설교는 성경 중심적이고 단순하며 명료했습니다. 그의 설교 주제는 거의 바뀌지 않았고, 단지 예화만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복잡하지 않고 평이하며 단순한 설교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분명하게 강조했으며, 박진감 넘치는 연설로 청중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성경이 말하기를(The Bible says)"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 권위를 두었습니다. 1949년 로스앤젤레스 전도대회 기간 중 성경이 참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목회를 변혁시킨 비결이 되었습니다.
빌리 그래함이 한국 방문 때 사적인 자리에서 밝힌 사역의 세 가지 열쇠는 '첫째도 기도요, 둘째도 기도요, 셋째도 기도'였습니다. 그는 약 4시간 이상 간절히 기도하고 강단에 올랐으며, 부인 루스 여사와 함께 매일 저녁 무릎 꿇고 앉아 대통령과 정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루스 여사는 "하루 한 시도 빠짐없이 주님과 연결되어 있기를" 소망했다고 전해집니다.
1948년 캘리포니아 모데스토에서 팀들과 함께 만든 '모데스토 선언문(Modesto Manifesto)'도 그의 사역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다른 단체나 단체의 지도자들을 비판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2) 주어진 재정을 책임 있게, 가장 높은 기준에 의해 관리하고 완전히 공개한다. 3) 진실을 말하며 집회 참가자 숫자 등 모든 통계는 정직하게 발표한다.
빌리 그래함은 이 선언문을 지킴으로써 평생 높은 도덕성과 순수함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1965년 연봉 19,500달러를 받았는데, 이는 일반 목사나 학생들보다도 더 낮은 봉급이었습니다. 나중에 39,500달러로 인상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영향력과 사역 규모를 고려하면 매우 겸손한 수준이었습니다.
가족과 신앙의 유산
빌리 그래함과 루스 여사는 2남 3녀를 두었습니다: 버지니아(Gigi), 앤(Anne), 루스(Ruth), 프랭클린(Franklin), 네드(Ned). 자녀들은 성인이 된 뒤에도 방황하여 5자녀 중 3자녀가 이혼을 경험했지만, 결국 모두 주님께 돌아와 복음 사역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장녀 지지는 남편 치비지안 박사와 결혼하여 7남매를 두고 있으며, 7권의 책을 출판하는 등 문서사역과 여성 대상의 상담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차녀 앤은 성경연구학회를 창립하였으며 웅변술이 뛰어나 세계 각처에서 연사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남편 롯즈와 세 자녀를 두고 있으며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의 이사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장남 프랭클린 그래함은 어린 시절 마약과 술, 폭주 등으로 방탕한 삶을 살았지만, 22세에 회심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1979년부터 '사마리안 퍼스(Samaritan's Purse)'의 회장 겸 CEO로 활동하며 170개 이상의 국가에서 구호 및 전도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2001년부터는 빌리그래함전도협회의 회장으로 아버지의 사역을 이어받아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2023년 6월 3일에는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50주년 기념대회'의 주강사로 서울 월드컵경기장에 섰습니다.
저서와 출판 활동
빌리 그래함은 많은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하나님과의 화평」(1984), 「행복의 비밀」(1985), 「도전」(1969), 「천사론」(1985), 「거듭나는 방법」(1977), 「성령론」(1978), 「상한 심령을 위하여」(1991), 「불타는 세계」(1965, 1년도 안 되어 44만 부 판매), 「내 소망은 구원입니다」, 「새로운 도전」, 「인생」, 「빌리 그래함의 소망」, 「빌리 그래함 자서전: 내 모습 이대로(Just As I Am)」 등이 있습니다.
그의 저서들은 구원과 영생, 하나님의 사랑, 고통과 소망 등 기독교 신앙의 핵심 주제를 다루었으며, 평이하고 실용적인 언어로 쓰여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았습니다.
건강 문제와 인내
빌리 그래함은 평생 동안 많은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습니다. 고혈압뿐 아니라 1960년부터 4번의 폐렴, 1959년 망막 뒤 혹으로 인한 오른쪽 눈 문제, 1971년 오른쪽 타액선 제거, 담석증 2번 수술, 1976년 혈전증 정맥염, 1978년 간염 등을 겪었습니다. 말년에는 전립선암과 파킨슨병 등 여러 질병을 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86세까지 전도 집회를 인도했으며, 쇠약해 보이면서도 곧 미소를 짓고 힘을 내어 청중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인내와 헌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겸손과 진실성
빌리 그래함의 삶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과 진실성이었습니다. 그는 "제 힘만으로는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그리스도께 데려오지 못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전도 집회에서 개종한 사람들은 빌리 그래함의 설교만으로 개종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들을 구세주께 데려온 수많은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미국 대통령들의 목사'라고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지만, 세계 주요 정치 지도자들과의 만남에 대해 자랑한 적이 없었습니다.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도 "죄송하지만 지금 제가 우리 가정부 아주머니와 대화 중이라서 좀 있다 다시 걸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유명 인사들과 찍은 사진이 하나도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주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렸으며, 자신을 높여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설교 단상 위에서든, 그가 일군 성과와 공헌을 치하하는 자리에서든 그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앞세우며 복음을 전파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타계와 추모
빌리 그래함 목사는 2018년 2월 21일 노스캐롤라이나 주 몬트리트의 자택에서 향년 99세로 별세했습니다. 그의 타계는 전 세계적으로 큰 애도를 불러일으켰으며, 미국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추모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2024년 5월에는 미국 국회의사당 국립조각상홀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동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자"라는 글귀가 새겨졌으며, 상하원 의원들은 만장일치로 동상 설립에 동의했습니다. 제막식에서 아들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는 "저희 아버지는 여기에 계신 것을 조금 불편해하실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늘 설교에 초점이 맞춰지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늘 집중하길 원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영원한 유산
빌리 그래함은 20세기 기독교 부흥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현대 복음주의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60여 년간 185개국 이상에서 약 2억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했으며, 라디오와 텔레비전, 영화, 책 등을 통해 수십억 명에게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단순히 숫자로 측정될 수 없습니다. 그는 미국과 전 세계의 복음주의 운동을 이끌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그의 전도 집회는 교회 부흥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의 사역의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신뢰, 끊임없는 기도, 겸손한 인격, 높은 도덕성과 진실성에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전하는 것"에 헌신했으며,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자 했습니다.
빌리 그래함의 생애와 사역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줍니다. 겸손함, 진실성, 끊임없는 기도, 성경에 대한 사랑과 헌신, 흔들림 없는 믿음 등은 모든 기독교인이 본받아야 할 덕목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쓰임 받은 노년을 꿈꾸십시오! 단순히 늙지 마십시오. 그리스천으로 멋지게 늙으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성경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그의 단단한 영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그가 남긴 복음의 유산은 그를 기리는 이들의 마음에 남아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은 진정으로 '미국의 목사'이자 '모두의 목사'였으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