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브르 사 비(Vivre sa vie)'라는 제목은 프랑스어로 '자기만의 삶을 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1962년 누벨바그의 거장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감독이 만든 걸작으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영화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실존과 자유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누벨바그와 장 뤽 고다르의 혁신적 시도
장 뤽 고다르는 195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일어난 영화운동인 누벨바그의 핵심 인물입니다. 누벨바그는 '새로운 물결'을 의미하며, 기존의 영화 관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영화 형식을 추구했습니다. 고다르는 특히 기존의 모든 영화 관습들을 타파하려 했고 모든 영화 형식들을 혁신하려 했으며, 기성세대의 고정관념들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누벨바그의 특징은 날 것 그대로를 담아내는 것에 충실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해진 대본과 스튜디오, 카메라 워킹 등에서 탈피해 배우가 해석한 작중 인물의 즉흥적인 감정과 실제 거리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당대의 풍경들을 인위적인 느낌 없이 담아냅니다.
안나 카리나: 누벨바그의 아이콘
영화의 주인공 나나 역할을 맡은 안나 카리나는 덴마크 출신의 프랑스 배우로, 프랑스 누벨바그의 '얼굴'로 불렸습니다. 그녀는 18세 때 파리에서 모델로 활약하던 중 샹젤리제 거리에서 마주친 장뤼크 고다르 감독에게 발탁되어 영화계에 진입했습니다. 카리나는 고다르 감독과 1961년 결혼했다가 3년 후 이혼했으며, 고다르의 뮤즈로서 《비브르 사 비》를 비롯한 여러 대표작에서 열연했습니다.
영화의 구성과 서사적 특징
《비브르 사 비》는 12장(12 tableaux)으로 구성된 독특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는 배우를 꿈꾸는 나나가 가난 때문에 결국 성매매 일을 시작하게 되고,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각 장은 나나의 삶의 단편들을 보여주며, 몰락 혹은 죽음을 암시하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배치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에 의해 몰락하는 한 여인의 삶을 다룹니다.
몽테뉴의 인용문과 철학적 의미
영화는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가져온 인용문으로 시작합니다. "IL FAUT SE PRÊTER AUX AUTRES ET SE DONNER A SOI-MÊME" (당신 몸을 다른 이들에게 잠시 내어줄지언정, 당신 자신은 당신 자신에게 바쳐라)라는 문구는 영화 전체의 주제의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실존주의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몽테뉴는 16세기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철학자로,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알기 위한 치열한 시도를 통해 '다른 사람이나 세상이 아닌 자신을 잘 이해하는 것이 곧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요 세상을 이해하는 길이다'라는 결론에 이른 인물입니다.
실존주의와 자기만의 삶
영화의 제목이 담고 있는 '자기만의 인생'이라는 의미는 실존주의 철학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흐름으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즉, 인간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창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라는 형을 선고받았으며, 스스로의 행위를 선택해야 하는 세상에 버려진 존재입니다. 이러한 자유와 책임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에 행동으로 참여하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얼굴을 그려나가는 것입니다.
소격 효과와 관찰자적 시선
고다르는 《비브르 사 비》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에서 영향을 받은 소격 효과(alienation effect)를 도입했습니다. 이는 등장인물의 자연스러운 행동과 대화를 단절시키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관객이 등장인물에 동화되는 일을 차단하는 기법입니다. 대신 이와 같은 소격 효과는 관객과 영화 사이의 거리를 형성하며 관객의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관찰을 이끌어내고, 더 나아가 관객 본인의 삶을 자문하도록 유도합니다.
영화적 기법의 실험장
《비브르 사 비》는 다양한 영화적 기법들을 실험한 작품으로도 유명합니다. 감독은 피사체의 배열과 이를 담아내는 카메라의 위치와 구도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 기존의 카메라가 담아내지 못했던 새로운 공간감을 구성했습니다. 또한 대화 장면에서도 말하는 인물을 순간적으로 앵글 밖으로 밀어내며 대사를 내레이션과 같은 작품 밖의 중립적 논평으로 변주하는 등 창의적인 시도를 펼쳤습니다.
사랑과 진실에 대한 탐구
영화에서 나나는 한 철학자와의 대화를 통해 말과 침묵, 그리고 사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말을 할수록 그 말의 의미가 사라져요"라는 대사는 언어와 진실 사이의 괴리를 표현합니다. 진정한 사랑과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나나의 모습은 현대인들이 겪는 실존적 고민을 반영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결코 로맨스나 열정에만 관한 것이 아니라 진실과 가치에 관한 것입니다. 연약함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지에 관한 것이며 온전함과 평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나나가 추구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진정한 사랑과 자기다운 삶이었을 것입니다.
자유와 책임의 딜레마
영화에서 나나는 "행동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어. 우린 자유로워"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제약 때문에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돈이 없으면 삶이 궁핍해지고 돈을 벌면 그녀의 꿈과 멀어지는 의도치 않은 상황을 마주하며, 나나의 일은 족쇄가 됩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행위였지만 결코 그 행위는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직면하는 자유와 제약의 모순을 잘 보여줍니다. 형식적으로는 자유롭지만 실질적으로는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 제약받는 현대인의 모습을 나나를 통해 그려낸 것입니다.
현대적 의미와 교훈
《비브르 사 비》가 던지는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자유롭고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나'는 왜 점점 작아져 갈까요? 현대에 살고 있어 다행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병들어 가고 있고 우울과 무기력감, 그로 인한 폭력성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진정한 '자기만의 인생'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타인의 기대나 사회적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자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책임을 동반하며, 때로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결론: 영혼이 소진되지 않도록
영화의 마지막에서 나나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녀가 추구했던 자유와 진정성에 대한 갈망은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고다르는 나나의 이야기를 통해 영혼이 소진되지 않도록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몽테뉴가 말했듯이, 우리는 타인에게 몸을 잠시 내어줄지언정 자신만은 자신에게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비브르 사 비', 자기만의 인생을 사는 방법일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비브르 사 비》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진정으로 자신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하는 소중한 작품으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