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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26절 :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중보 기도

by jisik1spoon 2025. 11. 6.

로마서 8장 26절의 본문과 의미

로마서 8장 26절은 성경 중에서도 성령의 사역과 기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핵심 구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 스스로는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을 아시고 친히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의 문맥적 배경

로마서 8장 26절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서 8장 전체의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은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다루는 장으로, '성령장'이라고 불릴 만큼 성령에 대한 언급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장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더 이상 죄의 정죄 아래 있지 않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로마서 8장 전반부(1-17절)에서는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에 대해 설명합니다. 바울은 성령을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생명의 영", "양자의 영" 등 다양한 표현으로 묘사하면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특별히 14-17절에서는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게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로마서 8장 중반부(18-25절)에서는 피조물의 탄식과 성도의 탄식에 대해 다룹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으며,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도들 역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지만 여전히 속으로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26절이 등장합니다. "이와 같이"라는 표현은 앞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으로, 피조물도 탄식하고 성도도 탄식하듯이, 성령 역시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본문에서 말하는 "연약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연약함은 단순히 신체적 약함이나 능력의 부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와 한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때로 무엇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어느 길이, 무슨 방법이 하나님의 뜻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던 사람도 상황이 바뀌면 헤매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연약함에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무엇이 참으로 필요한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필요한 것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 우리 자신의 욕심과 정욕을 따라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셋째, 우리는 기도할 때 잡념과 무관심, 냉담함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도우십니다. "돕다"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무거운 짐을 양쪽에서 맞잡는다'는 뜻입니다. 즉,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기도의 짐을 지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단순히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기도하시면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의 "도우시나니"라는 표현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곁에 함께 계시는 보혜사(상담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체질과 형편과 연약함을 알고 격려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다른 보혜사"(요한복음 14:16)의 역할입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의 의미

본문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표현 중 하나는 "말할 수 없는 탄식"입니다. 이 표현의 헬라어 원어를 살펴보면 더욱 깊은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탄식하다"로 사용된 헬라어는 '스테나조'(στενάζω)입니다. 이 단어는 "슬픔으로 고통하다, 신음하다, 불평 불만을 토해내다, 고통하다"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원 뜻은 고통 속에서 절망하며 한숨 쉬며 낙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탄식은 인간의 절망적인 탄식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탄식은 절대 절망에서 절대 소망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은 중보 기도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끊임없는 중보 기도 사역입니다.

"말할 수 없는"이라는 표현의 정확한 의미는 "말 없는" 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말로 표현되지 않는 깊은 탄식으로 기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탄식은 아무 때나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탄식은 어떤 일에 대한 근심이나 원망으로 인해 내쉬는 숨을 의미합니다. 깊은 아쉬움의 표현이며, 그것은 깊이 아는 것입니다. 간절함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탄식이 나올 수 없습니다. 모든 기대와 소망이 무너져갈 때 그때 나오는 것이 탄식입니다. 탄식은 아쉬움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간절함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줄도 모르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것을 구하니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그래서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간절한 기대와 긍휼의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성령의 중보 기도

로마서 8장 26-27절은 성령의 중보 기도에 관한 핵심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중보 기도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중보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성령의 중보란 성령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그들을 도와주고 인도한다고 믿는 기독교 신앙 개념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기도할 능력이 부족할 때에도,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과 의도에 맞추어 우리를 대신해 기도해 주십니다.

2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여기서 "마음을 살피시는 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살핀다"는 말은 '꿰뚫어 본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아시는 분이며,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성령께서 그리스도 사역을 위한 중보 기도를 올린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의 기도는 항상 하나님의 뜻과 일치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중보 기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신학적 해석이 있습니다. 존 칼빈은 기도에서 무엇을 구할지 그리고 무엇을 기도할지를 성령이 가르치는 사역과 관련지어 말합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성령의 활동을 기도하는 성도들의 노력과 분리하고 구분시킵니다.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

본문은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기도할 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실존입니다.

"마땅히 빌 바"를 알아야 합니다. 마땅히 빌 바를 알고 마땅히 빌 바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마땅히 빌 바는 두 가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마땅히 빌 바를 가르쳐 줍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 종교들의 기도는 자기의 필요를 구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다 자기의 필요를 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전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서 이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먹을 것을 구하기 전에, 용서를 구하기 전에, 보호를 하나님 앞에 요청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기도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은 빌 바를 모를 때 탄식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의 제목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 욕심을 걸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제목이 틀린 것입니다. 그것이 소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소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때 성령은 탄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들어봅시다. "하나님이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것이 처음 기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기도를 들어 보십시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는 성령이 도우시는 기도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삶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있을까요? 헷갈릴 때에 기도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계속 기도를 돕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의 내용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 그 자체를 사용하십니다. 기도의 내용과 응답을 정확히 이해하려는 것은 공로적인 기도입니다. 내가 바른 말을 할수록 바르게 응답하실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관계적인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느냐는 것보다, 그를 의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의 방향보다 마음의 방향이 더 중요합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싶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내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길 원한다면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기도 중에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 반드시 두 가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첫째,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추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체험 속에는 반드시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통회가 포함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시고, 집중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게 하십니다. 불신과 죄악 가운데 살았던 우리의 죄를 토해내게 하십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성령의 탄식에 이끌려 드리는 기도입니다. 만일 우리가 전혀 기도하지 않는다면 성령님께서는 혼자라도 탄식하며 기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인도하셔서 성령의 탄식을 따라하고,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심

27절에서 핵심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뜻대로"입니다. 성령께서는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이것은 성령의 기도가 결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연약함이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소원을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자기 뜻을 내세우기 때문에 신자로서 빌어야 할 것을 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아닌 내 소원으로 살아갈 때 성령님이 탄식하십니다. 성령님의 탄식을 아는 자가 진심으로 자신을 탄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으로 살기보다는 자기 뜻으로 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시는 성령님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대로 응답하십니다.

성령님께 이끌린 기도라면, 첫째,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며, 둘째, 아들을 통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셋째, 하나님의 성품과 방법에 맞게 됩니다. 기도는 아들을 통하여 성령님에 의해서 하나님께 나가는 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

로마서 8장 26-27절은 28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2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합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분인데 지금 고통이 있는 것은 더 큰 복을 주시려고 예비하시는 것입니다"라고 가르칩니다. 즉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이나 어려움 힘든 일들, 이 모든 것이 다 합력해서 우리에게 선, 즉 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의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 몸의 구속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합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의와 가능성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합력이라는 것도 서로서로 힘을 합해서 일하시는 합력으로 이해하지 말고 정해진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일하시는 합력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실패나 약점, 범죄, 불행까지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축복이 되게 해 주시며, 좋은 것이 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고통에서 성숙을 이끌어내시고 악까지도 선으로 바꾸셔서 사랑하는 자녀들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밝은 세상으로 나오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말씀에서 우리는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

로마서 8장 26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배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입니다. 로마서 8장 전체는 하나님의 자녀됨과 그에 따른 특권을 다루고 있습니다.

14절에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15절에서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선포합니다. 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라고 확증합니다.

바울이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독특합니다. 이것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고 활동한 바울만이 가지고 있는 아주 독특한 성령의 이해 방식입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 초대교회의 가장 큰 이슈는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가?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계시도 약속도 없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가?"였습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성령을 "양자의 영"으로 설명함으로써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처럼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유대인들처럼 적자는 아니지만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권리와 권한을 부여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라고 말씀합니다.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써 들을 수 있는 무한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십니다. 우리가 수고한 것이 없고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엄청난 특혜, 특별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연약함 속에서 발견하는 은혜

우리는 살다 보면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속이 상한다"는 말은 상처를 입는다는 말이요,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연약하다는 말입니다. 수없이 많은 상처를 받으면서 때론 그 "연약함"으로 인해 또다시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연약하지 않으려고, 더 강해지려고, 그래서 상처받지 않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성경은 연약함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있음을 말씀하시며 우리를 위로해 주고 있습니다. 연약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그로 인해 아파하는 모든 이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연약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교만할 수 없습니다. 연약한 자들의 심정을 이해하며,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가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처럼 연약한 이들과 더불어 사는 복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쇠뜨기라는 식물이 있습니다. 이 식물은 지구상에서 아주 오래 살아온 식물인데, 아주 연약한 마디를 가졌습니다. 조금만 힘주어 잡아당기면 뚝뚝 끊어집니다. 그런데 그 연약한 부분이 결국 쇠뜨기를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숙련된 농사꾼이라도 쇠뜨기를 뿌리째 없앨 수가 없습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다음 해 히로시마에 푸른 식물이 싹을 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쇠뜨기입니다. 뚝뚝 끊어지는 그 연약함이 쇠뜨기의 생명줄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예수님도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그도 연약한 사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53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기를 연한 순 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멸시를 당하였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연약한 존재, 그런데 이 예수가 온 세상을 구원하신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성령의 탄식을 경험하는 삶

상황을 견디지 못할 때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서 "아빠 아버지"를 부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어떤 때는 무엇을 어떻게 기도할지 모르고 그냥 "아버지"만 부르며 넋 놓고 눈물만 납니다. 기도해야 한다고, 기도해야 하는지는 알겠는데, 어떻게 구해야 할지, 무엇을 구해야 할지조차 힘들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무너졌을 때 하나님의 성령님은 우리를 만져주시며, 내 마음을 알아주시며,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다시금 기도할 수 있게끔 우리를 만드십니다.

아무도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친히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과 환경에서 힘듦을 느낀다 해도 위로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복음성가 가사에서 나오는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내 마음을 아시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주인공이 바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지쳐서 성도의 인내가 끝날 때 성령은 탄식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기도가 흔들릴 때 탄식하십니다. 야고보서 4장에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여서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는 중요한 선언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많이 지쳐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있을 때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 우리에게 크게 느껴지며 좌절의 상황이 되고 말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 마음을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요.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래도 주님 내가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겠지요. 주님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해 주세요."[36]

우리는 내 마음속의 죄의 법 때문에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성령님의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삶은 살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중보해 주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천적 적용과 교훈

로마서 8장 26절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실천적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방법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잃고,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잊게 됩니다.

둘째,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때에도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영으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내용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인도하십니다.

셋째, 우리의 연약함을 인해 상처받지 말고, 오히려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의 경지에 이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타인의 연약함은 내가 공격할 빌미가 아니라 감싸주어야 할 이유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하고,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 사람과 환경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고난의 상황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주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에 포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 견딜 만한 아픔 외에는 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도 안쓰러워서 함께 아파하시며, 도우시고, 기도해 주시고,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고 가시는 분이십니다.

다섯째,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이 없이는 우리는 제대로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고백하지 않은 숨은 죄가 있는지 성령께서 깨닫게 하여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구해야 합니다.

여섯째, 우리가 성령님의 탄식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탄식을 듣고 우리가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성령의 탄식에 이끌려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야 선지자가 기도하는 것처럼 강력한 기도, 효과적인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일곱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분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성령의 중보 기도가 주는 위로와 소망

로마서 8장 26절은 그리스도인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과 제한된 이해로 인해 기도할 때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도우시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우리가 비록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완전한 기도를 드릴 수 없어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믿고 의뢰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끊임없는 돌보심과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힘차게 활동하실 때, 우리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절망과 비참, 무기력과 연약함 가운데서도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기도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악함을 보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모습을 보게 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지 않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모든 성도는 항상 연약함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연약함을 그대로 내버려 두십니다. 대신 성도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그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받은 은혜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은 중보 기도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끊임없는 중보 기도 사역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탄식으로 오늘도 영혼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진리를 깊이 묵상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