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1904년 2월 8일부터 1905년 9월 5일까지 펼쳐진 러일전쟁은 일본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무력 충돌로,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한 사건이다. 이 전쟁은 아시아 국가가 유럽 열강을 상대로 승리한 최초의 근대전으로 기록되며,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가속화하고 한국의 식민지화를 결정지은 분수령이 되었다. 전쟁의 배경부터 주요 전투, 포츠머스 조약의 내용, 그리고 한반도에 미친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배경: 팽창주의의 충돌
러시아의 남하 정책
19세기 말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을 통해 극동 진출을 본격화했다. 1891년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확보 후, 1897년 여순항(포트 아서)을 조차하며 만주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청일전쟁(1894-1895) 후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반환하도록 압박한 러시아는 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하며 만주 내 영향력을 확대했다.
일본의 대륙 진출 야욕
메이지 유신(1868) 이후 근대화를 달성한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로 타이완과 요동반도를 획득했으나, 삼국간섭으로 인해 러시아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902년 영일동맹을 체결해 영국의 지원을 확보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준비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
한반도는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대륙 진출 모두에게 필수적인 전략적 요충지였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가 한국 내 영향력을 확대하자, 일본은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며 병참 기지로 활용했다.
전개: 주요 전투와 전략
개전과 초기 공세
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은 여순항 기습 공격을 감행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동시에 진해만과 마산을 점령해 한반도 남부를 장악했다. 4월 압록강 전투에서 일본 제1군이 러시아군을 격파하며 만주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여순항 공방전
1904년 8월부터 1905년 1월까지 이어진 여순항 포위전은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일본 제3군은 5개월간의 혈전 끝에 여순항을 함락시켰으나, 5만 명의 사상자를 내며 심각한 병력 손실을 겪었다.
봉천 회전: 최대 규모의 지상전
1905년 2월 20일부터 3월 10일까지 봉천(선양)에서 벌어진 전투는 양군 62만 명이 참여한 당대 최대의 지상전이었다. 일본군은 포위 작전으로 러시아군을 격퇴했으나, 7만 명의 사상자를 기록하며 전력 한계를 노출했다.
쓰시마 해전: 해상 패권의 확립
1905년 5월 27일,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는 쓰시마 해협에서 러시아 발트 함대를 전멸시켰다. 이 승리로 일본은 해상 주도권을 확보하며 강화 교섭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포츠머스 조약과 결과
조약 체결 배경
전쟁 장기화로 일본은 20억 엔의 전비 지출에 재정적 한계에 직면했고, 러시아는 1905년 혁명으로 내부 불안이 가속화되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중재로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
-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 인정
- 남만주 철도와 여순항·대련의 조차권 이양
- 사할린 남부(북위 50도 이남) 할양
- 전쟁 배상금 없음
국내외 반응
일본 내에서는 배상금 미획득에 대한 불만으로 히비야 방화 사건 등 폭동이 발생했다. 반면 러시아는 혁명 기운 속에서 체제 유지에 집중해야 했다.
한반도에 미친 영향
식민지화의 가속
전쟁 중 일본은 한반도에 통감부를 설치하며 경제적 착취를 본격화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후, 1910년 한일병합으로 완전 병합했다.
농민 저항과 항일 운동
일본의 토지 강탈과 노동력 착취에 맞선 2차 시흥농민봉기(1904)가 발생했으나 진압되었다. 전쟁은 한국 민중의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국제적 의미와 역사적 평가
백인 우월주의의 붕괴
아시아 국가가 유럽 열강을 상대로 승리한 첫 사례로, 제국주의 시대의 인종적 편견에 도전했다. 이 승리는 이후 아시아 민족 운동에 영감을 주었다.
제국주의 경쟁의 심화
전쟁은 영일동맹(1902)과 러시아-프랑스 협상 등 열강의 이해관계가 교차한 '제0차 세계대전'으로 평가된다. 일본의 승리는 태평양 전쟁(1941-1945)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한반도의 비극
전쟁은 한반도를 "승자의 전리품"으로 전락시켰다. 1905년 을사늑약부터 1910년 병합까지의 과정은 한국의 주권 상실을 고착화시켰다.
결론
러일전쟁은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충돌한 사건으로, 일본의 승리는 동아시아 패권 재편을 촉발했다. 전쟁의 결과 한국은 식민지화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이는 1945년 해방까지 지속된 비극의 시작이었다. 오늘날까지 한반도 분단과 동북아 긴장의 역사적 뿌리를 이해하는 데 이 전쟁의 여파는 중요하다.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의 지적처럼, "러일전쟁은 한국이 주체적 선택 없이 강대국의 전략에 휘말린 사례"로, 그 교훈은 현대 국제정치에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