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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섬 친일파 논란 : 법정 결론과 역사적 사실 검증

by jisik1spoon 2025. 5. 26.

한류 관광의 대표지인 남이섬을 둘러싼 친일재산 논란은 수년간 인터넷 공간에서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법부는 2019년 서울중앙지방법원을 통해 남이섬이 친일재산이 아니라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민병도가 자신이 모은 재산으로 남이섬을 매입한 것이지, 선대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으로 매입한 것이 아니므로 친일재산이라 할 수 없다고 명확히 판시했다. 이 판결은 남이섬을 둘러싼 오랜 논란에 법적 종지부를 찍었으며, 사실과 추측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남이섬 친일 논란의 역사적 배경

민영휘의 친일 행적

남이섬 논란의 출발점은 민영휘(1852~1935)의 명백한 친일 행적에 있다. 민영휘는 조선 말기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고위 관료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된 인물이다. 그는 명성황후의 15촌 조카로 여흥 민씨 가문 출신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적극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다.

 

민영휘의 친일 행적은 광범위하고 체계적이었다. 1910년 1월 일진회의 '합방성명서'에 찬성을 표명했으며, 합방찬성운동을 펼치는 정우회의 총재를 지냈다. 또한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935년 조선총독부에서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을 받는 등 일제로부터 지속적으로 포상을 받았다. 그는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920년대 최대 현금부자는 이완용, 1930년대 최대 땅부자이자 재벌은 민영휘였다는 기록이 있다.

민병도와 남이섬의 연관성

남이섬 설립자 민병도(1916~2006)는 민영휘의 손자지만, 직계 후손은 아니다. 민병도는 민영휘의 서자 민천식의 양자로 입양된 인물이다. 민병도 자신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이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는 1938년 동일은행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하여 1965년 한국은행 총재직에서 퇴임할 때까지 25년간 금융기관에서 근무했다.

법원의 최종 판단과 그 근거

2019년 서울중앙지방법원 판결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4민사부는 2019년 6월 26일 남이섬이 친일재산이 아니라는 확정 판결을 내렸다(사건번호: 2018가합545698). 재판부는 민병도가 자신이 모은 재산으로 남이섬을 매입한 것이지, 선대로부터 상속 내지 증여받은 재산으로 남이섬을 매입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구체적인 판단 근거를 제시했다. 민병도가 1965년 남이섬을 매입할 당시의 토지가격을 1972년 기준으로 추정하면 약 16,100,000원 정도였으며, 이를 2018년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611,059,400원 정도였다. 당시까지 민병도가 쌓아온 사회적 경력과 이에 수반하여 축적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자력을 고려하면, 민병도가 스스로 구입 가능하였을 금액으로 판단했다.

언론사 명예훼손 소송 승소

주식회사 남이섬은 시사저널 등 언론사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시사저널이 제출한 인터넷 기사나 인터넷 게시글만으로 민병도가 민영휘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으로 남이섬을 매입했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통상적이고 합리적 수준의 의혹제기를 넘어 남이섬은 민병도가 민영휘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으로 매입한 친일재산이라고 단정적으로 인상지우는 표현을 했다"고 비판했다.

민병도의 남이섬 매입 과정과 재원

매입 시기와 배경

민병도는 한국은행 총재에서 퇴직한 해인 1965년 그동안 자신이 받은 급여와 퇴직금 등을 모아 남이섬을 매입했다. 그는 남이섬에 종합휴양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1966년 남이섬의 소유자를 경춘관광개발주식회사로 법인화했으며, 2000년 4월 주식회사남이섬으로 상호 변경했다.

재산 형성의 합법성

법원은 민병도의 재산 형성 과정을 면밀히 검토했다. 그는 1938년부터 1965년까지 28년간 은행업에 종사했으며, 이 기간 동안 축적한 급여와 퇴직금으로 남이섬을 매입할 충분한 자력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민병도는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당시 한국은행 총재였던 민병도가 쌓아온 사회적 경력과 이에 수반해 축적했을 것으로 보이는 자력을 고려할 때 자력으로 남이섬을 구입할 수 있었다고 법원이 인정했다.

상속재산과의 구별

일부에서는 민병도가 충북 음성군 금왕읍 유포리 토지를 상속받았다는 점을 들어 의혹을 제기했다. 실제로 민병도는 민영휘 → 민천식 → 민병도로 승계된 토지 21필지 5만여㎡를 소유했으며, 이를 1947년과 1949년에 집중 매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토지 매각과 1965년 남이섬 매입 사이에는 시기적으로 상당한 간격이 있으며, 법원은 남이섬 매입이 상속재산이 아닌 민병도 개인의 근로소득으로 이루어졌다고 판단했다.

현재의 소유구조와 운영현황

법인화와 소유구조

남이섬은 1966년 법인화된 이후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1994년에는 민병도의 장남인 민웅기가 회사 명의를 '주식회사 남이섬'으로 변경하고 대표이사를 지냈다. 현재는 전문경영인이 대표를 맡고 있지만, 회사의 최대지분은 여전히 민씨 일가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광지로서의 성과

남이섬은 드라마 '겨울연가' 촬영지로 유명해진 후 연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대표적인 한류 관광지가 되었다. 코로나 사태가 끝난 2023년에는 1월부터 10월까지 외국인 45만3141명이 입장하는 등 국제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잡았다.

친일재산 환수 정책과의 관계

친일재산 환수 사업의 한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2006~2010년 활동 당시 남이섬을 국가에 귀속하지 못했다. 이는 남이섬이 이미 법인화되어 있었고, 민병도 개인의 재산으로 매입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사위는 남이섬을 제외한 민영휘 소유의 땅 51필지(73억원)에 대해서는 귀속에 성공했다.

 

조사위는 4년의 활동기간 동안 재산환수 대상으로 특정된 친일파 507명 가운데 168명의 토지 약 1,300만㎡를 환수했다. 그러나 친일파 후손들이 낸 토지 반환소송 137건 중 14건에서 국가가 패소하면서 여의도 면적의 4분의 1 크기에 달하는 199만3,366㎡가 원고 측에 되돌아가기도 했다.

현행 법률의 적용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친일재산이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 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하거나 이를 상속받은 재산을 의미한다. 그러나 남이섬의 경우 민병도가 해방 후 자신의 근로소득으로 매입한 것으로 법원이 인정함으로써 이 법률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결론

남이섬을 둘러싼 친일재산 논란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명확한 판결로 결론이 났다. 민영휘가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는 사실과 민병도가 그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남이섬 자체는 친일재산이 아니라는 것이 법원의 최종 판단이다.

 

법원은 민병도가 25년간의 금융업 경력을 통해 축적한 급여와 퇴직금으로 남이섬을 매입했다는 점을 명확히 인정했다. 또한 여러 언론사가 제기한 친일재산 의혹에 대해서도 법정에서 근거 부족으로 기각되었으며,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러한 법적 결론은 역사적 사실과 추측을 구분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친일파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는 분명히 중요한 과제이지만, 이는 명확한 사실에 기반해야 하며, 법적 절차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남이섬은 현재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화관광 자원으로서 한류 확산에 기여하고 있으며, 이러한 성과는 객관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