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파의 탄생 배경과 결성
적군파는 1960년대 일본 사회의 격동기 속에서 탄생한 극좌파 무장조직입니다. 1960년대 일본은 전후 복구를 마치고 고도경제성장기로 진입하던 시기였으나, 동시에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 베트남전쟁, 대학 내 비리 등으로 인해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1966년 재결성된 공산주의자동맹(제2차 분트) 내에서 시오미 타카야를 중심으로 한 관서파는 "과도기세계론 - 세계동시혁명론"을 주장하며 1968년 6월부터 분트 내부의 프랙션으로서 "적군파"를 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학생운동 방식에서 벗어나 무장투쟁을 통한 혁명을 주장했으며, "혁명에는 군사적인 행동이 필수적이며, '혁명전쟁' 수행으로 혁명을 쟁취한다"는 입장을 내세웠습니다.
1969년 9월 2일, 시오미 타카야를 포함한 약 30여 명이 가나가와현 조가섬에서 공식적으로 분트에서 이탈한 별도 조직으로서 "적군파"를 결성했습니다. 9월 5일에는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개최된 전국전공투 결성집회에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봉기관철, 전쟁승리", "가을의 전단계 봉기", "세계혁명전쟁", "세계적군건설과 혁명전쟁"을 주장했습니다.
적군파의 이념과 조직 구조
적군파의 주요 이념은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그리고 반제국주의였습니다. 이들의 핵심 이론은 일본에서의 혁명을 완수하고 세계혁명의 사령부로 기능하기 위해 당과 군대를 형성하며, 세계혁명의 최고 사령부인 혁명일본과 혁명의 적 총본산인 제국 미국 사이에서 "환태평양 혁명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직은 붉은 바탕에 흰 글자로 '赤軍'이라고 쓰인 헬멧으로 타 파벌과 구분되었으며,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전기파나 적군파의 군사주의를 비판하는 반기파, 정황파 등 다른 공산주의자 동맹의 파벌들과 대립했습니다. 적군파의 주요 주장은 전단계 무장봉기론과 세계혁명론이었으며, 대보살고개 사건 이후에는 국제근거지론이 추가되었습니다.
대보살고개 사건과 초기 활동
적군파는 결성 초기부터 과격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69년에는 오사카와 도쿄에서 일련의 파출소 습격을 감행했으며, 이들은 이를 "오사카 전쟁"과 "도쿄 전쟁"이라고 칭했습니다. 1970년 2월 22일에는 치바현의 우체국을 털면서 M작전(금융기관 강도질)을 개시했습니다.
1969년 11월 5일, 적군파는 일본도, 사제폭탄, 화염병으로 무장한 '군대'로 수상관저 습격을 목적으로 외딴 산속에서 군사훈련을 감행하다가 경찰의 급습으로 습격조 전원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보살고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제3중대, 제7중대 등 궐기부대들이 일망타진되었고, 적군파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대보살고개 사건 이후 국내에서 불법투쟁을 할 후방기지로서 해외의 베이스가 필요하다는 국제근거지론이 등장했으며, 이는 이후 요도호 사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요도호 납치 사건
적군파가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70년 3월 31일에 발생한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 일명 "요도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B작전의 일환으로 타미야 타카마로를 중심으로 한 적군파 요원 9명이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후쿠오카로 향하던 여객기를 납치한 사건입니다.
납치범들은 10대에서 20대의 젊은 나이였으며, 일본도와 권총, 폭탄 등의 무기를 가지고 여객기를 장악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가진 무기 대부분이 장난감이나 모조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요도호에는 승무원 7명과 승객 등 129명이 타고 있었으며, 납치범들은 처음에는 쿠바의 아바나로 갈 것을 요구했지만 연료량과 항속거리 문제로 북한의 평양으로 목표를 변경했습니다.
이들이 북한을 선택한 이유는 북한 정부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적의 적", "가까운 반미국가", "지도자를 (자기들 편으로) 조직화할 수 있는 노동자국가"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납치범들은 "우리는 내일의 조"라는 성명서를 작성했는데, '내일의 조'란 포기를 모르는 복서의 이야기를 그린 일본의 인기 만화였습니다.
비행기는 북한 영공으로 향했지만 연료 문제 등으로 김포공항에 착륙했고, 이후 복잡한 협상 끝에 야마무라 차관이 인질로 대신 잡히면서 승객들은 무사히 석방되었습니다. 4월 3일 요도호는 김포국제공항을 이륙하여 북한 영공에 들어갔으며, 4월 4일 북한은 승무원 3명과 야마무라 차관, 비행기는 일본으로 돌려보내고 납치범들의 망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적군파는 의장 시오미 타카야를 비롯한 간부들이 일망타진되고 조직은 거의 괴멸 상태가 되었습니다. 시오미 타카야는 요도호 사건 결행 직전인 1970년 3월 15일 체포되었는데, 그가 소지하고 있던 메모지에 'H·J'(Hi Jacking의 약칭)라고 적혀 있었지만 경찰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적군파의 분화와 파생 조직
한국에서는 전공투 시대에 파생된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일본적군, 연합적군을 뭉뚱그려서 적군파로 칭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 단체들은 모두 다른 조직입니다. 적군파가 모체가 되었고 여기서 파생된 조직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일본적군(JRA)은 일부 적군파 멤버들이 1971년 이후 팔레스타인으로 무대를 옮겨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와 합류한 것이 시초입니다. 시게노부 후사코를 두목으로 하여 PLO와 아랍 게릴라의 지원을 얻고 혁명과 반제국주의의 미명 하에 대리 테러를 일으켰습니다. 일본적군은 1972년 텔아비브 공항 습격사건, 1973년 JAL 소속 여객기 하이재킹, 1974년 헤이그 프랑스 대사관 습격 사건 등 수많은 테러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연합적군은 1971년 7월 15일 적군파의 군사조직인 중앙군과 혁명좌파의 인민혁명군이 통합되어 탄생했습니다. 연합적군은 이념적으로 마오주의를 내걸고 있었으며, 모리 쓰네오가 위원장, 나카타 요코가 부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연합적군의 마오주의는 원리주의적인 것으로서, 때로는 마오쩌둥 체제하의 중국까지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연합적군과 산악베이스 사건
1971년쯤 이미 일본의 학생운동은 시들해져서, 적군파와 혁명좌파는 대보살고개 사건, 요도호 사건 등으로 간부급이 체포되거나 국외도망 또는 사망하여 조직이 약화되었습니다. 적군파는 M 작전(금융기관 강도질)을 한 덕분에 자금력은 있었지만 무기가 없었고, 게이힌 혁명좌파는 모오카 총포상 습격사건으로 엽총을 손에 넣었지만 자금이 없었습니다.
경찰에 쫓기던 양파 회원들은 군마현의 산악지대로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한 거점으로 산악베이스를 마련하고 잠복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지고 외부 원조가 끊기면서 조직의 피폐화가 심해졌고, 1971년 연말부터 내부분열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1971년 12월 20일, 하루나 산의 혁명좌파 산악베이스에서 지도부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합법노선과 불법노선 사이의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산악베이스의 불법노선 지도부는 합법노선을 분파로 규정하고 '총을 겨누는 것'을 포함한 폭력적인 당파 투쟁을 검토했으며, 합법노선의 집합에 참여한 것으로 의심되는 회원에 대하여 폭력에 의한 "총괄"이라는 이름의 린치가 자행되었습니다.
연합적군은 "총괄"이라고 지칭되는 내부 숙청을 통해 동료 29명 중 12명을 집단 린치로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연합적군은 집단폭력을 동지들의 '공산주의화'를 돕는 행위라고 이론화했으며, 스탈린적 경향이 있다고 판단되는 멤버는 '사형'을 통해 살해당했습니다.
아사마 산장 사건
1972년 2월 19일부터 28일까지 일본 나가노현 기타사쿠군 가루이자와정에 위치한 '아사마 산장'에서 연합적군이 벌인 인질극은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카구치 히로시를 비롯한 연합적군 회원 5명이 아사마 산장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잡고 10일 동안 틀어박혀 경찰과 대치했으며, 당시 인질은 무려 219시간 동안이나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 전역에 생중계되어 JST 오후 6시 26분경 간토 기준 89.7%라는 조사 개시 이래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같은 날 NHK의 특보 프로그램은 평균 50.8%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전국민이 이 사건을 지켜보았습니다.
2월 28일 경찰이 강행 돌입해 인질을 무사히 구출하고 범인 5명을 전원 체포했습니다. 진압 과정에서 기동대원 2명, 민간인 1명이 사망했고, 중경상자 27명(기동대원 26명, 언론인 1명)이 발생했습니다.
진압 후 일본 경찰이 아사마 산장을 조사하면서 연합적군이 사상 단결을 구실로 동료 12명을 구타를 포함한 잔학한 방법으로 살해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는 일본 전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전국에서 활동하던 적군파 대다수가 회의감을 느끼게 하여 일본 적군파가 해체되는 제일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일본적군의 국제 테러 활동
일본적군(JRA)은 시게노부 후사코를 최고지도자로 하여 레바논의 베카고원을 주요 근거지로 삼아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 등 팔레스타인인 극좌무장단체와 연계하여 일련의 테러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은 1972년 5월 30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로드 공항(지금의 벤구리온 국제공항)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입니다. 일본적군 요원 오쿠다이라 쓰요시, 야스다 야스유키, 오카모토 고조 3명이 에어프랑스 132편을 통해 텔아비브 로드공항에 도착한 후, 수하물 청구 구역에서 여행가방 안에 포장된 자동 무기를 꺼내 무차별 사격을 가했습니다.
이 공격으로 26명이 사망하고 71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야스다 야스유키는 다른 공격자가 실수로 쏜 총에 맞아 사망했고, 오쿠다이라 츠요시는 수류탄 자살 또는 우발적인 조기 폭발로 죽었으며, 오카모토 고조는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과 일본 적군의 합동 작전이었습니다.
일본적군은 이외에도 1973년 JAL 소속 여객기 하이재킹, 1974년 싱가포르 쉘 석유 저장고 습격사건, 쿠웨이트 주재 일본 대사관 점거사건, 헤이그 프랑스 대사관 습격 사건, 1975년 쿠알라룸푸르 사건, 1977년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 1986년 자카르타 사건 등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외국 공관의 정부요인이나 납치한 비행기 승객을 인질로 삼아 몸값을 받거나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는 등 민간인도 말려드는 테러를 반복해 전세계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주요 인물들
시오미 타카야는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의 초대 의장으로, 1970년 3월 15일 체포되어 계속 감옥에 있었습니다. 1974년 7월 적군파 재건을 위해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프롤레타리아 혁명파)"를 결성했지만, 1970년대 말 조직 지도에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이유로 탈당했습니다. 출소 후 그는 무장투쟁을 반성하며 '재무장' 반대 운동을 펼쳤습니다.
타미야 타카마로는 요도호 사건을 일으킨 적군파의 주동자로, '마로'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오사카시립대학에서 학생운동에 참가했으며, 인질로 잡혀 있던 승객들에게 유일하게 자신의 성을 밝힌 멤버였습니다. 북한으로 망명한 후 요도호 그룹 리더로서 다른 멤버들에게 일본인 납치를 지시하는 등의 공작 활동을 했으며, 1995년 11월 30일 평양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북한당국의 비위를 거슬려 의문사했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시게노부 후사코는 일본적군의 최고 간부로,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중앙위원을 역임했습니다. 도쿄도 세타가야구에서 태어난 그녀는 메이지대학 문학부 사학지리학과 야학에 다니면서 문학연구회에 들어갔습니다. 일본적군의 "최고지도자"가 된 시게노부는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수많은 테러 사건을 주도했습니다. 그녀는 2000년 11월 8일 오사카에서 여권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2001년 일본적군의 해산을 선언했습니다. 헤이그 사건 관련 살인미수와 불법감금 혐의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고, 2022년 5월 28일 만기 출소했습니다.
적군파의 해체와 현황
일본적군은 2000년 시게노부 후사코의 체포 이후 2001년 조직해체를 선언했습니다. 시게노부는 조직해체를 선언하면서 "살아서 나왔다고 실감하고 있다"며 "50년 전 인질을 잡는 등 피해를 준 것 사과하며 반성한다"고 말했습니다.
독일 적군파는 1998년 4월 20일 로이터 통신에 보낸 '해체 선언문'에서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무장 투쟁에만 집중해온 것이 잘못이었다'며 활동을 중단한다고 밝혔습니다. 통독 이후 동독에 은신해 있던 조직원들의 신원이 드러나고, 그들의 투쟁 방식에 대해 좌파 내부에서조차 비판적 시각이 증폭되면서 해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요도호 사건의 납치범 9명 중 타미야 타카마로, 요시다 긴타로, 와케로 다케시 등 3명은 북한에서 사망했고, 1명은 1988년 일본에 잠입해 지하활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었습니다. 1명은 2000년 6월 태국에서 달러위조 혐의로 체포되어 일본으로 송환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현재 북한에는 나머지 4명의 범인과 일본인 처, 20여명의 자식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일본 공안당국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2022년 5월에는 1972년 이스라엘 텔아비브 로드 공항 테러 사건의 피해자와 유족 131명이 북한 정권을 상대로 약 40억 달러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북한은 적군파의 테러 모의를 돕고 일부 테러범들을 훈련하는 등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송의 피고가 되었습니다. 2024년 1월에는 피해자 측이 북한에 소장 전달을 완료했고, 북한의 공식 대응 부재를 근거로 궐석 판결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적군파가 남긴 역사적 교훈
적군파는 1960년대 일본 학생운동의 급진화와 폭력화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처음에는 미일안전보장조약 반대, 대학 내 비리 척결 등 정당한 명분으로 시작된 학생운동이 점차 과격화되면서 무장투쟁 노선으로 전환되었고, 결국 테러조직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연합적군의 산악베이스 사건과 아사마 산장 사건은 이념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동료들까지 잔인하게 학살하는 광기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들은 전국에서 활동하던 적군파 대다수가 회의감을 느끼게 하여 일본 좌파 운동의 쇠퇴를 가져온 요인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일본적군의 국제 테러 활동은 팔레스타인 분쟁에까지 뛰어들어 무고한 민간인들을 희생시켰다는 점에서 더욱 비판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혁명과 반제국주의의 미명 하에 대리 테러를 일으켰지만, 결국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고립되어 와해되었습니다.
적군파의 역사는 이념적 순수성과 폭력의 정당화가 어떻게 광기로 이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대중의 지지 없는 무장투쟁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 사회에서 학생운동이나 좌파 운동이 크게 위축된 것도 적군파와 같은 극단적 사례들이 남긴 부정적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꼬꼬무와 적군파
SBS의 교양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에서는 요도호 납치사건과 적군파에 대해 다루면서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프로그램에서는 당시 김포공항 관제사였던 채희석의 인터뷰를 방송 최초로 공개하며 사건의 긴박했던 순간들을 생생하게 재현했습니다.
특히 요도호 사건의 주범 적군파가 북한으로 망명한 후 51년이 지난 현재, 생존자 4명이 트위터를 통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꼬꼬무 제작진이 직접 적군파의 트위터 계정에 메시지를 보냈고, 그들에게서 답장이 왔다는 사실도 공개되었습니다.
요도호 납치범들은 현재 트위터에 "일본에 돌아가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 "일본이라는 국가와 민족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는 글을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극좌 사상에 경도되어 북한을 '일본 혁명'을 위한 배후지로 삼으려 했던 이들이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북한에 살면서 겪은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맺음말
적군파는 1960년대 일본 사회의 격동기 속에서 탄생하여 1970년대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극좌파 무장조직이었습니다. 세계혁명과 반제국주의를 내세웠지만, 결국 테러와 폭력으로 점철된 그들의 활동은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동료들끼리의 잔혹한 살해와 무고한 민간인들에 대한 테러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요도호 사건, 아사마 산장 사건, 텔아비브 공항 테러 등 적군파가 일으킨 사건들은 일본 사회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좌파 운동의 급진화와 폭력화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 되었습니다. 현재 적군파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사망하거나 복역을 마쳤으며, 일부는 북한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적군파의 역사는 이념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성을 잃고 광기로 빠져든 한 시대의 비극을 보여주며, 어떤 명분도 테러와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