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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김을동 :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후손으로서 정치와 사회 활동을 이어온 부녀의 삶과 업적

by jisik1spoon 2025. 11. 20.

김좌진 장군과 그의 후손들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

김좌진 장군은 1889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1930년 만주에서 순국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입니다.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명여, 호는 백야입니다. 김좌진 장군은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하였으며, 17세의 나이에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수십만 평의 전답을 나눠주는 등 계몽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 장군은 북로군정서 사령관으로서 만주 화룡현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소수의 병력으로 3,300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물리쳐 항일 독립운동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를 기록했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 이후 대한독립군단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25년에는 신민부를 창건하여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직을 겸임했습니다.

1930년 1월 24일, 김좌진 장군은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습니다. 사망 직전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좌진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김두한의 탄생과 어린 시절

김두한은 1918년 6월 23일 김좌진 장군의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머니 김계월과 함께 서울에서 살았으며, 아버지 김좌진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김좌진의 가족으로서 불령선인으로 지목되면서 김두한의 어린 시절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김두한은 교동공립보통학교에 잠시 다녔으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제대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1930년 13세가 되던 해 집안 사정이 어려워 홀로 경성에 올라왔다가 거지패에 잡혀 수표교 아래에서 살아가다가 원씨 성의 한 노인을 만나 17세까지 성장하였습니다. 원 노인은 김두한에게 "왜놈의 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 곧 독립하니 그때 공부하라"라고 말하며 학교는 다니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하도록 했습니다.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1930년 만주에서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했을 때 김두한은 13세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이 사건은 훗날 김두한이 조선공산당을 탈퇴하고 우익으로 전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을동과 3대에 걸친 가문의 역사

김을동은 1945년 10월 10일 서울 종로에서 김두한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소당입니다. 김을동은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손녀이자 김두한 전 국회의원의 딸로서 부친에 이어 2대째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부녀 재선 국회의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김을동은 서울재동국민학교, 풍문여자중학교, 풍문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하였습니다. 1963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한 이후 1964년 뮤지컬 배우로 데뷔하였고, 1967년 DBS 동아방송 공채 성우로 입사하여 방송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40여 년간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김을동 사단"으로 불릴 만큼 많은 후배 배우들을 지도했습니다.

김을동의 아들 송일국은 배우로 활동하며 KBS 드라마 '주몽'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2012년 세쌍둥이 아들 대한, 민국, 만세를 두었습니다. 이로써 김좌진 장군부터 송일국의 세쌍둥이 아들까지 5대에 걸친 가문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두한의 생애와 활동

일제강점기 조직폭력배 시절

김두한은 원 노인이 죽은 후 서울에서 조직폭력배들을 제압하며 1935년 나이 18세에 우미관을 장악하였습니다. 당시 종로는 일본인과 조선인 상인들이 섞여 있었고, 김두한은 우미관을 거점으로 종로 지역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는 일본 야쿠자 하야시패와 평화협정을 맺은 뒤 인천, 부산, 함흥, 신의주 등 전국을 순회하며 각 지역의 주먹들을 평정했습니다.

김두한은 개인적으로 1930년 후반 배우 김승호를 동양극장 극단에 소개하고, 곤경에 처한 권투선수 정복수를 도와주었으며, 종각의 술집에서 일본 헌병 장교들을 때려눕혀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레슬링 선수 황병관을 구해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그를 '협객'으로 미화하는 근거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유흥가나 상가 주변을 배회하면서 '힘'으로 호구를 해결하는 주먹패였습니다.

태평양 전쟁 이후 1942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인 강제 징용 징용장이 발부되자, 김두한은 조선총독부와 협상하여 경성특별지원청년단을 조직했습니다. 서울만 3,000여 명, 전국적으로는 2만 명에 이르는 청년 대군 조직이었습니다.

해방 후 우익 활동과 정치 테러

1945년 해방 이후 김두한은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참여하여 일본군 무기고를 점령하거나 치안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곧 죽마고우이던 공산주의자 정진영, 만담가 신불출, 박헌영과의 인연으로 조선공산당의 전위대장을 역임했습니다.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갑동에 의하면 김두한이 전위대장으로 역임한 이후 민족진영에서는 조선공산당에 대해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임시정부 계열 비밀결사인 백의사, 이규갑, 장덕수 등에게 아버지 김좌진의 죽음이 공산주의자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 김두한은 조선공산당을 탈퇴하고 우익으로 전향하였습니다. 김두한은 라디오 방송에서 자신이 백의사 소속임을 밝혔습니다.

김두한은 대한민주청년동맹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반탁운동 등 좌우대립에서 우익의 선봉장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는 산정호수 김일성 별장 습격, 박헌영 납치 미수, 학병동맹 습격, 전평 본부 습격, 심영·신불출 습격, 과거 친일사업가들의 거금 압수, 9월 총파업 등에 활약하였고, 김원봉 습격, 좌우합작 방해(여운형 협박 벼랑에서 낙하사건, 김규식 협박) 등에도 관여하였습니다.

1946년 9월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청년단체들이 동원되었는데, 김두한이 이끄는 대한민청 별동대원이 가장 공이 컸습니다. 이들은 장택상이 넘겨준 경찰전문학교 실습용 총 300여 정과 수류탄 3상자를 가지고 용산철도파업현장을 습격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김두한 스스로 "죽창으로 전평 대원을 죽이고 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47년 4월 김두한은 좌익이 주관하는 연극 '제3전선'이란 공연이 열리던 시공관을 습격하여 3명의 좌익인사를 납치, 죽이는 사건에 가담했습니다.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김두한은 투옥되고 1947년 5월 대한민청은 미군정청 해산명령 제1호로 해산되었습니다. 미군정의 CIC는 김두한 그룹이 '우익'이라고 정치적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문적인 살인강도범'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국회의원으로서의 활동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중이었던 김두한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 출범으로 인해 사건이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검찰로 이관되었고, 곧 석방되었습니다. 그 후 대한청년단의 감찰국장 겸 건설국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김두한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단 500표의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었습니다. 그가 민심을 휘어잡아 당선된 비결은 솔직한 연설 때문이었으며, 당시 그는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라고 나섰습니다. 당시 국회사에 기록된 김두한의 의정활동은 거의 없으나, 자유당 시절 국회에서 이승만을 친일파라고 몰아붙인 의원은 그가 유일했습니다.

1965년 서울 용산 보궐선거에서 한독당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습니다. 김두한은 국회 첫날 신상 발언을 통해 제3공화국 권력자를 향해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1966년 이른바 한독당 내란음모 사건을 엮어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음모, 폭발물사용 위반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과 정치 투쟁

사카린 밀수 사건의 배경

1966년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이 일본에서 사카린 원료를 밀수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정부와 대기업의 유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부정부패 사건으로, 국민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김두한은 이 사건을 "이병철이 밀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범죄를 저지를 만한 환경을 조성해 줬기 때문"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정부와 대기업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거센 와중에 국회에서는 대정부 질의가 진행되었습니다. 김두한은 이 사건에 대해 "민족주의를 파괴하고 재벌과 유착하는 부정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현 정권을 응징하고자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1966년 9월 22일 국회 본회의장 사건

국회 질의 마지막 날인 1966년 9월 22일, 김두한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당시 김두한은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이라는 조작 사건에 휘말렸다가 겨우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독립당은 완전히 와해되어 무소속인 상태였습니다.

김두한은 대정부 질문 도중 국무위원 석에 앉아 있던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 수 명의 각료들을 향해 오물을 뿌렸습니다. 그는 "오늘날 삼년 몇 개월 동안 부정과 불의를 합리화하고 국민의 모든 재산을 도적질하는 이 내각을 규탄하는 국민의 사카린 올시다. 고루 고루 맛보아야 알지"라며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가져온 똥을 국무위원들을 향해 퍼부었습니다.

당시 김두한의 비서로 일했던 채원기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 전날인 9월 21일 밤 9시경에 신문로에 있는 김두한의 집 화장실에서 깡통으로 만든 두레박을 이용하여 김두한이 직접 인분을 퍼서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두한은 집으로 돌아가며 "준비한 오물은 전날 밤 33인의 독립열사들의 혼이 서린 파고다공원 담을 넘어 공중변소에서 퍼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은 본인의 집 화장실에서 비서와 함께 준비한 것이었지만 파장을 극대화하고 명분을 쌓기 위해 정치적인 발언을 했던 것입니다.

사건 이후의 여파와 의미

이로 인해 회의는 중단됐고, 정일권 총리를 비롯한 내각은 총사퇴를 선언했습니다. 이효상 당시 국회의장의 징계 요구에 따라 국회법제사법위원회는 김두한 의원의 제명을 결의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국회에서 똥물을 뿌렸으니 당연히 여당에서 구속동의안을 냈습니다.

구속 직전에 김두한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뒤 서울교도소(구 서대문형무소)에 구속 수감됐습니다. 김두한은 국회의장 모욕,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되었습니다. 김두한은 "행동으로 부정·불의를 규탄한다"고 정부를 꾸짖었으며, "이거나 쳐먹어라"며 장관들에게 똥물을 퍼부은 것은 "장관들 개개인한테 던진 것이 아니라 헌정을 무시하면서 밀수사건을 비호하는 제3공화국 정권에 던진 거"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은 한국 국회사에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권력의 부패와 재벌의 비리에 대한 극단적인 저항의 표현이었습니다.

구분 김두한 (金斗漢) 김을동 (金乙東)
본명 김두한 김을동 (호: 소당)
생몰년도 1918년 6월 23일 ~ 1972년 11월 21일 (54세) 1945년 10월 10일 ~ (79세)
본관 신안동 김씨 안동 김씨
주요 경력 조직폭력배, 독립운동가, 제3·6대 국회의원 배우, 성우, 제18·19대 국회의원
대표 활동 일제강점기 종로 지역 조직 활동, 해방 후 우익 반공 활동, 국회 오물 투척 사건(1966년) 영화 '마파도' 시리즈 출연,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상임이사장
가족 관계 부: 김좌진 장군 / 장녀: 김을동 / 외손자: 송일국 조부: 김좌진 장군 / 부: 김두한 / 장남: 송일국

김두한의 말년과 의문의 죽음

중앙정보부의 고문과 건강 악화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김두한은 대한민국 제7대 국회 선거 때 경기도 수원시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였습니다. 유세 도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깃불 관련 발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으로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두한 의원은 중앙정보부 김형욱 부장에게 끌려가 혹독한 고초를 겪었을 뿐 아니라 내란음모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재판까지 받았습니다. 김두한은 약 1년 정도 수감됐는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결국 이때의 고초로 폐인이 된 김두한 의원이 제명대로 살지 못한 이유는 김형욱의 고문이 원인이었다고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말합니다.

김두한은 고혈압과 심부전, 당뇨, 신장염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증상으로 보면 만성 심부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972년 사망의 미스터리

1972년 11월 19일 김두한은 갑자기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었다가 11월 21일 오전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야인시대에서는 호텔 객실에서 쓰러진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실제로는 호텔에서 쓰러진 후 자택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날 김두한은 아침 일찍 전화를 받고 나갔으며, 누구를 만났는지, 호텔에 같이 있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동거인이 도착했을 때 김두한 주변에 낯선 남자들이 있었다고 하며, 접수를 하고 오니 그 남자들은 자취를 감췄다고 전해집니다.

김두한의 알려진 사망 원인은 뇌출혈이며, 고혈압이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응급 일지에는 외상이 없고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경과 전문의는 "응급 일지만을 놓고 볼 때 김두한은 뇌출혈에 의해 사망했다"고 밝혔습니다.

후손들이 밝힌 죽음의 전말

김두한의 딸인 배우이자 정치인 김을동은 미국에서 우연찮게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정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만난 그는 김을동에게 '내가 김두한의 마지막을 지켜봤다'라고 했으며, 그는 한때 남산(중앙정보부)에서 일한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김두한은 정치 생활 도중 수하였던 이정재에게 습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자료 영상의 실제 김두한 증언에는 "담배 피우다 보니까, 이정재 등 여러 동지가 칼과 총을 가지고 왔다. 세계 역사상 과거 자기 부하들이 커서 오야붕(두목)에게 칼을 들이대면 (다른 나라라면) 바로 죽인다. 능지처참을 한다"며 분노의 일갈을 날리는 모습이 담겨있었습니다.

이정재가 사망한 10년 뒤 어느 날, 또 다른 괴한에게도 뒤통수를 가격당한 김두한은 범인의 정체를 캐지 말고 "가만 있으라"고 만류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무렵 소문이 파다했으며, 김두한을 테러한 배후에는 권력가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김을동의 배우 및 정치 경력

성우와 배우로서의 활동

김을동은 1963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한 이후 1964년 뮤지컬 배우로 데뷔하였고, 1967년 DBS 동아방송 공채 성우 입사 1년 후 1968년 TBC 동양방송 공채 성우로 이적 입사하여 방송계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동아방송 3기 성우로 입사한 후 여러 드라마와 영화의 배우로 활동하였습니다.

40여 년간 드라마 출연으로는 '전설의 고향', '용의 눈물', '가보면 알 거야',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시트콤 '김치 치즈 스마일', 드라마 '반올림 3', '며느리 전성시대' 등 다수 작품에서 활동했습니다. 영화로는 '마파도', '마파도 2', '내츄럴 시티', '카리스마 탈출기' 등이 있으며, 특히 '마파도' 시리즈가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김을동은 유동근, 박상원, 전광렬 등 연기자들에게 연기 지도를 해 준 일화도 유명하며 "김을동 사단"으로 불리었습니다. 김을동 씨 말에 따르면 간호사를 빼고 다 맡아 본 것 같다고 합니다. 2005년 주연을 맡은 영화 '마파도'로 300만 관객을 동원했으며, 속편인 '마파도2'에서도 주연을 맡았습니다. 2008년 1월 21일, 연기자 분야에서 사실상 은퇴하였습니다.

서울시의원과 국회의원 활동

김을동은 1995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동대문구 제3선거구에 출마하여 서울특별시에서 최다득표를 얻으며 서울시의회 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현직 서울시의원 재임 중 민주당을 탈당하였고 끝내 1996년 제15대 총선 출마를 위해 서울시의원을 사퇴하였지만 총선에서 낙선하였습니다.

2000년 4월 13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6대 총선에서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의 자유민주연합 지역구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으며, 2004년 4월 15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또 다시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에 출마하였으나 재차 낙선하였습니다.

2008년 1월 29일, 친박연대에 당무위원으로 신규 입당하여 2008년 4월 9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8대 총선에서 친박연대의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습니다. 이는 부친인 김두한 전 의원에 이은 2대째의 정계 진출이며, 대한민국 최초의 부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2012년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서 24년 동안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서울특별시 송파구 병 선거구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제3, 6대 재선이었던 부친 김두한 전 의원에 이은 최초 부녀 재선 국회의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2016년에 치러진 20대 총선에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의 남인순에게 밀리며 낙선했습니다.

김을동 의원은 2011년 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SK커뮤니케이션즈의 개인 정보 3,500만 건 해킹 사고의 원인이 SK커뮤니케이션즈 내부의 보안 시스템 부실에 있음을 밝혀 내 전 국민적 관심을 집중받기도 했으며, 2011년 국감 우수 의원에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활동

김을동은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상임이사장을 맡아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01년부터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일을 착수하여 중국 만주 지역에 기념사업을 전개해 왔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의 조선족 시장이 10년 전 국가보훈처를 방문했을 때부터 기념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김을동은 "할아버지가 세운 학교가 아직까지도 조선족 학교로 남아 있었다. 중국집 열 채를 헐어서 김좌진 장군의 흉상을 세우고 돌아왔다"고 밝혔습니다. 김을동은 10년 전부터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자료 발굴도 하고 기념관도 건립하다 보니 돈이 끝없이 들어갔으며, 압구정동의 65평 아파트를 날리고 월세 100만원짜리 집에 살았습니다.

중국 헤이룽장성 하이린시에 위치한 '한중우의공원'을 조성하였으며, 이 공원은 김좌진 장군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알리고 양국의 우의를 다지는 일을 합니다. 중국 동포가 한국과 중국을 잇는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분들에게 한글과 컴퓨터 교육도 했습니다. 독립운동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념전시관, 편히 쉴 수 있는 문화마당을 만들었고 한국에서 방문한 이들을 위한 숙소도 지었습니다.

김을동은 "할아버지는 청산리 전투의 장군으로만 기억되지만, 17세 때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 수십만평의 전답을 노비들에게 나눠주고 45명의 집안 노비문서를 불태운 계몽사상가이기도 합니다. 18세 땐 집에 '호명학교'를 세웠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 일본군과 싸우면서도 주둔하는 곳마다 학교를 세웠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송일국과 3대에 걸친 가문의 현재

외손자 송일국의 연기 활동

송일국은 2008년 5살 연하 판사 정승연 씨와 결혼해 2012년 세쌍둥이 아들 대한, 민국, 만세를 품에 안았습니다. 송일국은 삼둥이와 함께 2014~2016년 KBS2TV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해 육아 일상을 공개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송일국은 KBS 드라마 '해신'으로 얻은 인기 덕분에 집안 빚을 청산했습니다. 그는 "그 시절 엄마가 할아버지(故 김두한) 기념관을 짓느라 집을 다 팔고 월셋집마저 쫓겨날 신세였다"며 생활고에 시달렸던 과거를 고백했습니다. "'해신'하면서 대박이 났다. 원래 사극을 하면 광고가 안 들어온다. 더더군다나 악역이었다. 그런데 광고가 몰려들었다. 그러면서 어머니 빚 다 갚아드리고, 지금 집도 마련해 드렸다"고 밝혔습니다.

송일국은 모친인 배우 김을동과 판사 아내의 독특한 관계를 공개했습니다. "엄마가 국회의원이 오랜 꿈이었다. 그동안 가족들이 모두 반대했었다. 그런데 아내만 어머니의 꿈을 지지했다. 아내는 엄마가 그동안 일구신 것들을 성취하는 게 맞다며 응원했다"고 전했습니다. "결국 엄마는 국회의원이 되셨고, 아내는 그때 부산으로 발령 갔는데 4년 동안 연락 한번 안 해도 문제없었다"고 고부갈등 없이 단단한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의 사명

김을동은 초등학교 때부터 역사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자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줘 민족혼을 심는 일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이자 의무 아닙니까? 현행 교육과정에서 한국사가 독립교과목이 되지 못하고, 사회교육 과정에 통합돼 그 중요성이 간과되고"라고 밝혔습니다.

송일국은 해마다 한국 대학생들을 데리고 만주로 가서 역사탐방체험을 합니다. 김을동은 "역사성 없는 국무위원들은 퇴진하고 이명박 대통령은 한일군사협정 의결을 폐기하라"고 밝히며, "전범국가 일본과 무엇이 급해 여론을 무시한 채 졸속으로 한일 군사협정 체결을 처리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김을동 의원은 대표 발의 법안으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대한 특별법안'(2012년 7월 3일)을 제출하는 등,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역사 바로 세우기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가문이 현대 한국 사회에 남긴 유산

김좌진 장군부터 김두한, 김을동, 송일국, 그리고 송일국의 세쌍둥이 아들까지 5대에 걸친 가문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의 영웅이었으며, 김두한은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의 혼란기를 거쳐 국회의원으로서 권력의 부패에 맞서 싸웠습니다.

김을동은 배우로서 한국 연기계에 족적을 남겼으며, 국회의원으로서 독립운동가의 공훈 선양과 역사 바로 세우기에 힘썼습니다. 송일국은 배우로서 성공을 거두며 가문의 빚을 청산하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역사 교육과 기념사업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 가문은 독립운동의 유산을 계승하고, 정치적 저항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며, 후손들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을동은 "역사를 홀대하며 어찌 민족혼을 지키겠나"라고 강조하며, 가문의 역사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김두한과 김을동이 한국 현대사에 남긴 의미

독립운동의 유산 계승

김좌진 장군은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여 항일 독립운동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를 기록했습니다. 소수의 병력으로 3,300여 명에 달하는 독립군의 10배 규모의 일본군을 물리쳐 대승하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또한 17세의 나이에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전답을 무상 분배한 계몽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김두한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서, 비록 조직폭력배로 시작했지만 해방 후 우익 활동과 국회의원으로서의 활동을 통해 정치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았으며,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했습니다.

김을동은 할아버지 김좌진 장군의 기념사업회를 이끌며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존하고 알리는 데 헌신했습니다. 그녀는 "할아버지뿐 아니라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공적을 알리고 일제강점기와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싶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정치적 저항과 민주주의

김두한은 국회의원으로서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했습니다. 자유당 시절 국회에서 이승만을 친일파라고 몰아붙인 의원은 그가 유일했으며, 1966년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은 권력의 부패와 재벌의 비리에 대한 극단적인 저항의 표현이었습니다.

김두한은 "대통령이 여기에 나왔으면 호되게 한번 따지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이에 충격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엄격한 수사를 지시했습니다. 김두한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이때 몸이 상해 급사의 원인이 됐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김을동은 부친 김두한에 이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의 공훈 선양과 역사 바로 세우기에 힘썼습니다. 그녀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에 대해 "전범국가 일본과 무엇이 급해 여론을 무시한 채 졸속으로 한일 군사협정 체결을 처리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며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또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대한 특별법안'을 대표 발의하는 등, 역사 정의 실현에 앞장섰습니다.

후손들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

김을동은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를 이끌며 자료 발굴과 기념관 건립에 헌신했습니다. 집까지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냉랭한 중국 당국과 접촉하며, 공안들에게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당하면서도 역사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압구정동의 65평 아파트를 날리고 월세 100만원짜리 집에 살면서도 기념사업을 계속했으며, 아들 송일국이 드라마 '주몽'으로 떠서 겨우 집을 샀습니다.

송일국은 '해신'으로 대박을 낸 후 "어머니 빚 다 갚아드리고, 지금 집도 마련해 드렸다"고 밝혔습니다. 송일국은 해마다 한국 대학생들을 데리고 만주로 가서 역사탐방체험을 하며,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김을동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자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줘 민족혼을 심는 일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이자 의무"라고 강조하며, 초등학교 때부터 역사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부터 김두한, 김을동, 송일국으로 이어지는 이 가문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독립운동 정신은 손녀 김을동과 외증손자 송일국에게까지 이어지며, 역사 교육과 독립운동 기념사업을 통해 계승되고 있습니다. 김두한의 파란만장한 삶과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은 권력의 부패에 맞선 저항의 상징으로 기억되며, 김을동의 배우 및 정치 활동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가문의 역사는 독립운동의 유산을 계승하고, 정치적 저항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며, 후손들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