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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약조 :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조일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1609년 광해군 시기 대마도주와 체결한 13조의 강화조약

by jisik1spoon 2025. 10. 21.

기유약조의 배경과 체결 과정

기유약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 만인 1609년(광해군 1)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송사조약입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과의 국교 정상화를 적극 추진한 것이 체결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임진왜란에 반대하여 군사를 파병한 적이 없다는 점을 내세워 1599년부터 3차례에 걸쳐 대마도주를 통해 조선에 외교 교섭을 요청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찬반양론이 대두되었으나, 조선은 수교의 선행조건으로 세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첫째는 국서를 일본이 정식으로 먼저 보낼 것, 둘째는 임진왜란 중에 성종, 정현왕후, 중종의 무덤을 훼손한 범인을 인도할 것, 셋째는 노략질을 자행한 자들에 대한 압송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이를 충실히 이행하자 조선은 교섭에 임하여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기유약조의 주요 내용

기유약조는 전문 13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왜관 접대와 외교 절차에 관한 규정으로, 왜관의 접대는 세 가지 예가 있었습니다. 국왕사가 한 예, 대마도주 특송이 한 예, 대마도 수직인이 한 예로 구분했습니다.

 

세견선과 세사미두 규정에서는 대마도주에게 내리는 쌀은 모두 100석으로 하고, 세견선은 20척으로 제한하되 특송선 3척을 포함시켜 계산했습니다. 이는 이전 계해약조의 50척, 임신약조의 25척보다 더욱 축소된 것이었습니다.

 

체류 기간과 통제 조치로는 왜관에 머무르는 기간을 대마도주의 특송선 110일, 세견선 85일, 그밖에는 55일로 제한했습니다. 조선에 들어오는 모든 왜선은 반드시 쓰시마 도주의 허가장(문인)을 지녀야 했으며, 허가장 없는 자와 부산포 외에 정박한 자는 적으로 간주한다고 명시했습니다.

 

도서와 문인 제도에서는 대마도주에게 전례에 따라 도서(구리인장)를 만들어 주되, 종이에 견본을 찍어서 예조·교서관·부산포에 보관하여 서계가 올 때마다 진위를 살피도록 했습니다.

 

과해량(과해료) 규정으로 일본 사신이 공적인 업무로 조선에 왔다가 돌아갈 때 소요되는 기간에 따라 식량을 지급했는데, 대마도인 5일분, 대마도주 특송인 10일분, 국왕사 20일분을 지급하도록 했습니다.

광해군 시기의 왜관 제도

기유약조 체결 이후 왜관은 조선 후기 대일 외교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왜관은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외교·무역 업무를 담당하는 공간으로, 1607년 두모포에 설치되었다가 1678년 초량으로 이전했습니다.

 

두모포 왜관은 1607년부터 1678년까지 약 70년간 존속했으며, 이곳에서 조선 후기 조일 외교와 무역에 필요한 여러 규정과 왜관 운영 방침 등이 수립되었습니다. 왜관에는 보통 400~500명의 대마도에서 온 성인 남자가 살고 있었고, 많을 때에는 1,000여 명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왜관무역은 공무역, 사무역, 밀무역의 세 유형으로 나뉘었습니다. 공무역은 국가나 국가기관이 주체가 되어 훈도·별차 등 역관이 담당했으며, 사무역은 정부가 지정한 상인이 일본 측과 거래하는 것이었습니다. 개시무역은 매월 6차례(3일, 8일, 13일, 18일, 23일, 28일) 실시되었습니다.

세견선 제도의 변화

세견선은 조선시대 대마도주에게 내왕을 허락한 무역선을 의미했습니다. 계해약조(1443)에서는 50척으로 허용되었던 세견선이 임신약조(1512)에서는 25척으로 반감되었고, 기유약조에서는 20척으로 더욱 축소되었습니다.

 

세견선의 목적은 무역이었지만, 규정상 모든 선박에는 반드시 정관이 승선해 외교적인 절차를 밟아야 교역이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선박은 예조참의 앞으로 보내는 외교문서인 서계를 가지고 와야 했으며, 상국에 예를 갖추어 교역하는 진상·회사·구청의 교역 방법을 원칙으로 하는 조공적 무역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기유약조에 따라 1611년(광해군 3) 9월 대마도주가 조선 후기 들어 최초의 세견선을 파견했으며, 이로써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양국 관계는 외교와 교역 관계가 모두 재개되었습니다.

조선통신사 제도의 시작

기유약조 체결 이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은 1607년 제1차 회답겸쇄환사를 시작으로 1811년까지 총 12회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회답겸쇄환사는 일본 막부장군이 먼저 국서를 보낸 데 대하여 조선이 '회답'하고, 임진·정유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데려오는 '쇄환'한다는 두 가지 목적을 띠고 파견된 사행입니다. 1607년, 1617년, 1624년 세 차례에 걸쳐 파견되었으며, 사행의 파견 절차나 편성 체계에 있어서 통신사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통신사는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사절로, 대등한 국가간에 신의를 통하는 사절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통신사의 조건으로는 첫째 조선 국왕으로부터 일본 장군에게 파견되고, 둘째 일본 국왕의 길흉 또는 양국간의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목적을 가지며, 셋째 조선 국왕이 일본 국왕에게 보내는 국서와 예단을 지참하고, 넷째 사절단은 중앙의 고위관리인 삼사 이하로 편성되어야 했습니다.

 

통신사는 외교만이 아니라 학술·사상·기술·예술 등 문화교류의 통로이기도 했으며, 일본측은 선진국 조선으로부터 문물을 배우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기유약조의 역사적 의의

기유약조는 조선 후기 대일 외교 체제를 정립한 기본 조약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습니다. 이 조약은 이전의 임신약조·계해약조보다 일본 측에 더 많은 제한을 가한 것이었으며, 특히 대마도에 무역의 독점적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광해군의 실리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체결된 기유약조는 남방 안정을 통해 북방의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광해군은 누르하치의 세력 확장으로 인한 북방 지역의 긴장감 증대를 감안하여 일본과 언제까지 냉랭한 관계를 고집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기유약조를 체결했습니다.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조선은 기유약조를 통해 피로인 쇄환, 자국 정치의 안정화, 평화로운 국제관계 형성 등 현실적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을 왕래하는 통신사 편에 조총과 장검 등을 구입해 오도록 하여 북방 위협에 대비한 군사력 강화에도 활용했습니다.

 

교린체제의 재편성을 통해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조선 후기의 대일 외교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이로써 19세기 전반까지 약 200여 년간 양국의 평화적 관계가 지속되었습니다.

 

제한적 개방정책의 성격을 보여주는 기유약조는 조선에 입국하는 일본인은 대마도주가 발행한 문인을 소지해야 하며, 입국 지역을 부산포로 한정하는 등 철저한 통제 하에서 제한적인 교류를 허용했습니다. 이는 조선이 일본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상화하기보다는 일본과의 무역을 관리·통제하려는 목적이 강했음을 보여줍니다.

 

기유약조는 임진왜란의 참화를 딛고 조선과 일본이 새로운 평화 질서를 구축한 외교적 성과였으며, 광해군의 탁월한 현실 인식과 실리 외교의 산물이었습니다. 이 조약을 통해 구축된 조선 후기 한일관계는 동아시아 평화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양국 간 문화교류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