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번의 정의와 역사적 배경
권번이란 무엇인가
권번(券番)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기생들의 활동을 중개하고 관리하였던 일종의 상업 조합을 일컫는 말입니다. 1915년 이전에는 기생조합(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나, 일본식 용어로 통일되면서 권번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권번은 기생들의 요정 출입을 지휘하고 감독하며, 고객으로부터 받은 화대(花代)를 관리하고 기생들의 세금 납부까지 담당하는 중간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권번은 단순한 기생 알선 업체가 아니라 기생 양성, 교육, 관리를 담당하는 일종의 기생 학교이자 매니저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습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권번 기생은 고등 예술 교육을 받은 예술인이며, 권번 자체는 고등 예술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권번에 속한 기생들은 술과 웃음을 파는 일반 기생들과는 엄격히 구별되었으며, 순전히 몸을 파는 윤락여성들과도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관기제도와의 연계
권번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의 관기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기생제도는 관기(官妓)로 운영되었으며, 이들은 궁중의 약방이나 상방(尙房) 등에 소속되어 약을 달이거나 바느질하는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궁중에서 연향(宴饗)이 있을 때에는 이들 관기들이 노래와 춤을 선보였습니다. 관기들은 시문(詩文)·음곡(音曲)·습자(習字)·가무(歌舞)·예의(禮儀) 등 높은 수준의 교양과 기예를 갖추도록 교육받았습니다.
1905년 일제에 의한 궁내부 제도개편의 일환으로 조선조 궁중정재를 담당하던 여악제도가 폐지되면서, 여악에 소속되었던 관기들은 생계를 잃게 되었습니다. 1908년 관기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조선의 전통 기생문화는 새로운 형태로 재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권번 성립의 과정
일제강점기 초기인 1909년, 국권을 상실한 이후 관기제도의 폐지와 함께 기생들이 최초로 모인 조합이 서울의 광교조합(廣橋組合)입니다. 이 조합은 남편이 있는 기생, 즉 유부기(有夫妓)들로 구성되었으며, 이후 한성권번(漢城券番)으로 개칭되었습니다.
1915년부터는 일본식 표현인 '권번'으로 공식 명칭이 통일되었습니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도쿠가와(德川) 시대의 일본식 유곽제도를 본떠 1916년 3월 데라우치(寺內) 총독이 공창제도를 공포했습니다. 이에 따라 기생 활동도 허가제가 되어 모든 기생들은 권번에 기적(妓籍)을 두고 세금을 납부하게 되었습니다.
권번의 구조와 조직
주요 권번 조직의 형성과 발전
권번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은 1913년 서울의 다동조합 설립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다동조합은 이후 조선권번(朝鮮券番)으로 개칭되었으며, 광교조합은 한성권번으로, 낙원동에는 종로권번(鍾路券番)이 신설되었습니다. 이 세 권번은 경쟁하면서 명창들을 배출했고, 기생문화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1923년에는 경화권번이 조선권번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24년경에는 한성·한남·대정·조선 권번이 4대 권번으로 번성하였습니다. 한성권번과 한남권번은 조선인에 의해 경영되었으나, 대정권번과 조선권번은 일본인이나 친일파에 의해 경영되었습니다. 한성권번은 전통적으로 기생을 관리해온 별감 계층의 기부들이 모여 만들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주장하며 "그래도 한성권번인데"라고 자부했다고 전해집니다.
1942년 8월에는 조선, 종로, 한성의 3대 권번 주주들이 병합하여 삼화권번(三和券番)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발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일제에 의해 영업제지를 받았다가 광복 후에 부활하였으나, 1947년 10월 14일 과도정부 법률 제7호로 공창제도가 폐지되면서 한국의 권번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지방 권번의 분포와 특성
서울의 권번이 중심이 되었지만, 지방에도 많은 권번이 설립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교방청이 존재했던 지역 대부분에 권번이 설치되었으며, 광주·남원·달성·경주·개성·함흥 등지에 권번이 존재했습니다. 이 중에서 평양에 설립된 기성권번(箕城券番)이 특히 널리 알려졌습니다.
1920년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수탈이 시작되고 군산항으로 이어지는 수탈 경로를 따라 먹거리가 풍부했던 정읍, 김제, 군산, 남원 등지의 전북 권번 활동이 매우 왕성했습니다. 각 지역에서는 보다 뛰어난 기생들을 배출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으며, 이로 인해 지역별 특색있는 전통예술 전승이 이루어졌습니다.
권번의 운영 체제
권번은 주식회사 제도로 운영되었습니다. 권번에 등록된 기생들을 관리하기 위해 매일 초일기(草日記)라는 기생 명단을 요리집(요정)에 발송하여, 단골 손님이 아닌 사람도 기생을 부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물론 예약도 가능했습니다. 기생들이 요정에 나가 일한 후 받은 화대는 권번을 통해 처리되었으며, 여기서 일정 부분이 권번의 수수료로 떼어졌습니다.
권번의 주된 기능은 모든 교육과정을 수료한 기생들이 요정에 나가는 것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생들의 영업을 중개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기생 양성 과정을 만들고 기생들의 수익을 나누었으며, 기생들이 정부에 바쳐야 하는 세금까지도 관리했습니다.
| 권번 구분 | 설립연도 | 경영자 | 특징 |
|---|---|---|---|
| 한성권번 | 1914년 | 조선인 | 기생조합 전통 계승, 정통성 강조 |
| 조선권번 | 1913년(다동조합) | 혼합 | 정악원학감 하규일 관여 |
| 종로권번 | 1920년대 | 조선인 | 낙원동 중심, 전성욱 설립 |
| 한남권번 | 1920년대 | 조선인 | 경상·전라도 기생 중심 |
| 대정권번 | 1920년대 | 일본인/친일파 | 대정시대 명칭 반영 |
| 삼화권번 | 1942년 | 혼합 | 3대 권번 병합, 일제 통제 |
권번의 교육 과정과 기생 양성
입학 조건과 교육 기간
권번에 들어가는 학생들을 학습기생(學習妓生) 또는 동기(童妓)라고 불렀습니다. 입학 자격은 8세부터 20세까지의 여성들이 대상이었습니다. 신입 기생을 보충할 때는 권번에서 인물, 태도, 가무, 서화 등을 심사한 후 채용했으며, 어린 나이의 기생들을 양성하는 일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권번의 수업 연한은 기본적으로 3년이었습니다. 3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시험인 배반(排盤)에 통과해야만 비로소 기예증(技藝證)을 받아 기생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기예증을 받은 기생들은 일패(一牌)·이패(二牌)·삼패(三牌)로 분류되어 등급제로 관리되었습니다.
교육 과정의 내용
권번의 교육 과정은 매우 포괄적이고 체계적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시(詩)·화(畵)·가(歌)·무(舞)·악(樂) 등의 예능 교육이 중심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삼강행실(三綱行實)과 같은 예절 및 교양 교육이 실시되었습니다.
악기 교육도 상당히 체계적이었는데,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장고, 아쟁, 해금, 피리, 대금, 소금 등 다양한 악기들을 배웠습니다. 가(歌) 교육에서는 가곡(歌曲)과 가사, 시조, 경기잡가, 서도잡가, 민요 등을 습득했습니다. 무(舞) 교육에서는 정재(呈才)를 비롯한 향악정재(鄕樂呈才) 관련 춤들을 배웠습니다.
지역별로 차별화된 교육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강원도 기생들은 관동별곡을 외웠고, 안동 기생들은 사서 중 대학을 외웠으며, 함경도 기생들은 제갈공명의 출사표를 줄줄 외웠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권번은 기생들을 단순한 유흥인이 아닌 교양있는 예술인으로 양성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학업과 실습의 병행
권번의 교육은 이론 교육뿐 아니라 실제 무대에서의 경험을 포함했습니다. 대정권번의 경우 기생 수업이 20여 명 정도 단위로 이루어졌으며, 이왕직 아악부에 있던 하규일(河圭一)과 악사 11명이 기생들을 가르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악원학감(正樂院學監) 하규일이 무부기(無夫妓)들을 모집하여 서울 다동에 세운 조선권번에서도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기생들은 권번에서의 교육을 통해 순수한 예술성을 갖춘 예인(藝人)으로 성장했습니다. 혹독한 훈련과 교육을 견뎌내며 시·화·가·무·악 등 예능뿐만 아니라 교양과 예의까지 갖춘 전문 예술인으로 변모했습니다.
권번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
기생 알선과 화대 관리
권번의 가장 실질적인 기능 중 하나는 기생들의 요정 출입 알선과 화대(花代) 관리였습니다. 요정에 손님이 들면 시중을 들 기생의 이름을 대고 인력거로 기생을 데려왔습니다. 요정 측은 권번에 소정의 수수료를 지불하였으며, 기생 개인이 받은 화대도 권번을 통해 처리되었습니다.
권번은 기생들의 화대 수금 업무를 담당했을 뿐 아니라, 기생들이 정부에 납부해야 하는 각종 세금까지 관리했습니다. 이로 인해 권번은 기생들을 관리하는 중간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동시에 일제 식민 정부의 통제 기제로도 작동했습니다.
전통음악 보존과 전승의 중심
권번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한국의 전통음악과 춤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것이었습니다.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궁중에서 전승되던 정악(正樂)과 정재(呈才)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때, 권번은 이러한 전통예술을 계승하는 마지막 보루 역할을 했습니다.
권번에서는 시조, 경기잡가, 서도잡가, 민요 등 다양한 음악 장르를 교육했으며, 이러한 음악들은 이왕직 아악부와 함께 한국 전통음악의 맥을 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권번에서 배출한 명창들과 전문 연주자들은 이후 한국 전통음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명창 배출의 장
권번은 전통음악의 명창들을 배출하는 중요한 기관이었습니다. 한성권번, 조선권번, 종로권번이 경쟁하면서 각각 뛰어난 음악가들을 배출했으며, 지방의 권번들도 지역 전통음악의 발전을 주도했습니다. 특히 평양의 기성권번은 우수한 기생과 명창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전북 지역의 권번들은 판소리와 국악 발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권번 기생들은 요정에서의 활동 이외에도 다양한 무대에서 공연했습니다. 이러한 공연 활동을 통해 권번 기생들은 대중들에게 한국의 전통음악과 춤을 소개하고 보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권번의 변질과 문제점
일제의 통제와 제도 변화
일제강점기 초기 권번은 기존의 기생조합 전통을 어느 정도 계승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제의 통제와 상업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변질되어 갔습니다. 1940년대 초반을 넘어서면서 일제는 모든 예기조합의 활동을 금지시켰으며, 권번 기생들도 점차 통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1914년 권번으로 공식 명칭이 변경되면서부터 권번은 일본식 관료 조직으로 재편되었습니다. 기생들은 허가제로 운영되었으며, 일제의 엄격한 감시와 통제 아래 있었습니다. 이러한 통제는 기생들의 개인의 자유를 제한했을 뿐 아니라, 전통음악 활동까지 규제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기생문화의 하향화
권번이 번영을 누리던 초기에는 권번 기생들이 고도의 예술 교육을 받은 예술인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권번 기생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게 되었습니다. 카페 문화, 여급 문화의 형성에 따라 기생들도 전통적인 가무보다는 유행가나 사교춤을 더 즐기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신창권번(新彰券番)과 같은 후발 권번들은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창부들에게도 기생이라는 명칭을 주어 조합 허가를 내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권번의 질적 수준이 저하되었으며, 전통 기생문화 전체가 사회적 경시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권번 기생과 윤락 행위의 경계
권번 기생들이 점차 일반 윤락여성으로 취급받게 되면서 권번의 전통 기생과 윤락 행위 사이의 경계선이 흐려지게 되었습니다. 하류 기생들이 창녀화되면서 전통 기생 전체가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권번의 고등 예술 교육 기능이 점차 축소되었습니다.
이러한 변질은 일제 식민 통치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기생 제도를 상업화하고 통제하면서, 조선의 전통 기생 문화를 변질시키고 이를 통해 식민 지배를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권번의 유산과 현재적 의미
국악 전승의 밀알로서의 권번
권번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권번의 유산은 현재의 한국 국악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권번에서 교육받은 기생들과 명창들의 예술 활동은 일제강점기 가장 어려운 시대에 한국의 전통음악과 춤을 보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권번이 배출한 명창들은 이후 국악원의 설립과 국악 교육의 체계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의 공립 국악원, 국립국악원, 그리고 민간 국악원 등이 설립되는 과정에서 권번의 전통과 경험이 중요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1940년대 초반 모든 예기조합의 활동이 금지된 후, 권번의 기능은 현대의 국악원으로 자연스럽게 이행되었습니다.
권번 복원사업과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근래에 일부 지역에서는 권번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인식하고 권번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전라북도 정읍의 고택문화체험관은 옛 권번을 재현하여 권번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고 전통 문화예술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권번이 단순한 역사적 유물이 아니라, 한국의 전통음악과 춤을 보존한 중요한 문화기관임을 인식하는 노력입니다.
권번을 재현해보고자 하는 사업은 일제강점기 초기 여악제도의 폐지 이후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조직되어 약 30여 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던 예기조합들의 기능적 측면과 건축물 등이 함께 복원, 재현될 때 그 의미가 있습니다.
권번 기생의 역사적 재평가
최근에는 권번 기생들의 역사적 지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권번 기생들은 단순한 유흥인이 아니라, 혹독한 교육과 훈련을 거쳐 높은 예술성을 갖춘 예술인이었습니다. 그들은 국권 상실과 식민 통치라는 극도로 어려운 시대에 한국의 전통음악과 춤을 보존하고 전승한 문화 유산의 수호자였습니다.
권번 기생들의 활동은 한국 현대음악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에 전통문화의 맥을 잇게 했으며, 이를 통해 이후 국악의 부흥과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따라서 권번 기생들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들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습니다.
주요 권번의 특징과 기생들
한성권번의 정통성
한성권번은 광교조합에서 출발한 것으로, 기생조합 전통에서 가장 정통성 있는 권번으로 평가되었습니다. 한성권번은 조선인 출신의 별감 계층과 기부들이 경영했으며, 이들은 조선시대부터 기생을 관리해온 전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성권번은 "그래도 한성권번인데"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다른 권번들과의 경쟁에서 정통성을 내세웠습니다.
조선권번의 위상
조선권번은 다동조합에서 출발한 권번으로, 정악원학감 하규일 같은 음악 전문가들이 관여했습니다. 조선권번은 무부기(無夫妓)들을 모집하여 설립되었으며, 뛰어난 음악가들을 배출했습니다. 조선권번은 1923년 경화권번이 조선권번으로 개칭되면서 그 명칭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종로권번과 다른 권번들
종로권번은 낙원동에 설립된 권번으로, 정악원학감 하규일 다음으로 전성욱(全聖旭)이 설립했습니다. 세 개의 주요 권번(한성, 조선, 종로)이 경쟁하면서 한국의 전통음악 발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 세 권번이 1942년에 병합하여 삼화권번이 되었습니다.
지방 권번의 명성
지방의 권번들도 뛰어난 기생과 명창들을 배출했습니다. 평양의 기성권번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전북 지역의 권번들(정읍, 김제, 군산, 남원)은 판소리와 국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동래권번(釐柬權番)은 가장 최근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해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결론 및 권번의 역사적 의의
권번은 일제강점기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매우 복잡한 위치에 있던 기관이었습니다. 일방적으로는 일제의 식민 통치와 상업화 논리에 편입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급속하게 소멸 위기에 처한 한국의 전통음악과 춤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마지막 보루 역할을 했습니다.
권번은 조선시대의 교방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현대적 상업 조직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격변을 반영했습니다. 권번에 속한 기생들은 혹독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높은 예술성을 갖춘 예술인으로 성장했으며, 극도로 어려운 시대에 한국의 문화를 지킨 문화유산의 수호자였습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권번을 재평가할 때, 권번이 가진 역사적 의의와 문화적 가치를 균형있게 고려해야 합니다. 권번의 부정적 측면도 분명 존재했지만, 국악 보존과 전승이라는 측면에서 권번의 기여는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권번의 유산을 발굴하고, 권번 기생들의 역할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작업이 한국 근현대 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